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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Oct 01. 2022

보쉬와 그뤼네발트, 기괴한 쾌락과 성스러운 고통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인간을 위한 위로

14세기 유럽은 흑사병으로 절멸에 가까운 공포를 체험했다.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를 죽음을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15세기에 이르러 부활한 인문주의는 이성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우주가 바뀌는 혁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항해는 유럽인들의 지평을 넓혀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했다. 질병과 죽음은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영역이었고, 비이성적인 마녀사냥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는 이런 시대에 매우 특별한 그림을 선보였다. 보쉬의 그림에는 알 수 없는 동물과 기괴한 괴물들이 출몰했고, 그뤼네발트의 그림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고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화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인간이 차마 보지 못했던 장면을 세상에 선물했다.




보쉬,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특별하고 섬뜩한 환상의 제국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네덜란드 남부지역의 한 도시에서 전 생애를 보냈다. 그는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았고 존경받는 시민이었다. 그런데 그가 남긴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림1] 히에로니무스 보쉬,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닫힌 상태, 1505-1510년경, 양쪽 날개 각각 2.20×0.97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이 작품은 단색으로 그려진 태초의 창조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그림1] 거대한 구형의 세계가 이제 막 창조되었다. 왼쪽 상단 구름 사이에서 신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축복하고 있고, 두 패널의 상단에는 성서의 문구가 쓰여있다. “그가 말씀하시자 이루어졌으며 명하시자 견고히 섰도다.”(시편 33:9) 의미심장해 보이는 구름이 꿈틀대고 있지만 회색빛 세상엔 아직까지 적막만이 감돌고 있다.


패널을 펼치면 드디어 화면 전체에 생기가 넘친다.[그림2] 왼편에는 아름다운 동물들이 사는 환상적인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하느님을 사이에 둔 아담과 이브가 보인다. 남녀의 결합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신의 축복 속에서 공인되고 있다.




[그림2]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열린 상태



이와 대조적으로 오른쪽 패널에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사람들은 이승에서 지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악기들에 몸이 묶인 자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음란한 음악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옥엔 이 밖에도 동물과 인간, 사물과 생물이 뒤엉킨 그로테스크한 형상들이 가득 차 있다.


[그림3]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열린 상태 가운데 패널 <쾌락의 동산>


에덴동산과 지옥 사이에는 무질서한 쾌락의 동산이 펼쳐진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신이 허락한 남녀의 결합을 넘어서 쾌락을 탐닉하는 자들로 이후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상한 것은 저주받아 마땅한 쾌락의 정원이 에덴동산만큼이나 밝고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알몸으로 말을 타고 사과를 따먹는 남녀의 모습은 남의 이목을 꺼리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세부를 면밀히 살펴보면 육욕에 잠식당한 인간들이 서로를 유혹하고 동물과 뒤섞이는 기괴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곳은 분명 거짓 낙원이다.


앞서 말했듯 이 그림의 많은 부분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우리는 화가가 왜 그토록 기괴한 형상들로 화폭을 채웠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막 이성의 눈을 뜬 르네상스인이 조화로운 낙원이 아니라 특별하고 섬뜩한 환상의 제국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지난 시대를 암흑기라 명명하고 인간과 이성의 부활을 선포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할 현상들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보쉬의 화폭에는 합리주의에 대해 저항하듯 음산하고 납득 불가능한 무언가가 화면 위로 계속 떠오르고 있다.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 고통받는 인간을 위한 특별한 위로


보쉬가 환상으로 섬뜩한 공포를 안겨주었다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생생하고 리얼한 표현으로 인간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의 <이젠하임 제단화>는 고통과 영광의 극단을 보여주며 아직 종교의 세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림4]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이젠하임 제단화 닫힌 모습의 부분, 1515년, 2.69×1.42cm, 운터린덴 미술관, 콜마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그림4]에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도 미화하지 않고 묘사되었다. 채찍질로 찢어진 육체와 가시관에 찔려 피 흘리는 머리, 십자가 아래로 축 처지는 몸의 고통이 화면 가득 울려 퍼진다. 뒤틀리고 곤두선 손은 예수가 겪는 고통의 강도를 보여준다. 예수 왼편에 있는 성모는 요한의 품에 쓰러졌고, 바닥에 무릎 꿇은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으로 전율한다. 반면 세례자 요한은 초연한 자세로 예수를 가리키며 이 모든 것이 성서에 기록된 신의 뜻임을 말해준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초월해 있다.


보쉬의 제단화처럼 이 그림도 펼치면 반전이 일어난다.[그림5] 쓰러진 성모가 그려진 패널 뒷면에는 아름다운 <수태고지>가 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려진 패널 뒤편에는 <부활>이 있다. 태양과 같은 후광과 하나 된 그리스도는 고귀한 못 자국만을 남긴 채 육체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버렸다. 예수의 고통은 부활의 이면이었고,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신비였다. 하지만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은 제각기 쓰려져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장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림5]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수태고지>, <천사 합창단>, <성탄>, <부활> – 이젠하임 제단화 열린 모습의 부분.


이 두 패널 사이에는 <천사 합창단>과 <성탄>이 그려졌다. 천사들은 성모자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아기 예수는 지금 막 목욕을 마치고 성모의 품에 안겨있다.[그림5] 그런데 천사들 사이에는 초록색 깃털로 몸을 감싼 괴물 같은 첼리스트가 숨어있다.[그림6]


[그림6] 이젠하임 제단화 <천사 합창단>의 부분

그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타락시키는 죄의 유혹을 상징한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지만 악마는 사라지지 않았고 천사들 사이에서도 건재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뤼네발트는 교회의 타락을 보며 멀지 않아 닥칠 종교개혁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락한 시대, 종교적 위기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다행히 화가는 악의 유혹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사물들을 그려두었다. 그중 하나는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 낡은 강보이고, 다른 하나는 아기가 손에 들고 있는 산호이다. 낡은 천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허리에 두른 천을 상기시키고, 산호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즉 이 그림은 예수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죄의 유혹을 빗겨나갈 수 있는 길임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하임 제단화>는 그것이 놓였던 장소를 생각하면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그림은 안토니테 교단의 교회를 위해 제작되었는데, 이 교회는 사실상 병원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이 신이 내린 형벌이자 죄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런데 한 위대한 화가가 예수가 겪은 극단의 고통을 보여주며 그것이 신의 계획이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한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즉 화가는  환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고난이 선한 사람에게도 올 수 있는 삶의 과정이며, 찬란한 영광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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