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직인과 교양을 갖춘 예술인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론과 관찰, 기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에게 붙은 별명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뒤러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유산과 다양한 예술적 성과들이 쌓인 피렌체에서 교육받은 다 빈치는 물려받은 유산이 풍부한 여유 있는 귀족과 같았다. 반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성장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예술적 성과를 간헐적으로 수혈받으며 혼자서 자수성가해야 하는 서민이었다.
“겨울에 내가 어찌 태양을 갈망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는 신사이지만 귀국하면 기생충이다.”
베네치아에서 화가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문화를 목격한 뒤러는 고향에서의 화가의 지위를 한탄하며 이렇게 썼다. 독일에서 누구보다 높은 명성을 지닌 화가였음에도 뒤러는 자신이 불우不遇하다고 느끼곤 했다. 또한 뒤러는 종교개혁의 기운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사상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북유럽에서 그는 종교적 문제와도 씨름했다. 덕분에 그는 이탈리아 화가들은 마주하지 못한 고민에 빠졌다. 나는 누구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에게 종교적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대략 1,200점에 이르는 뒤러의 작품들은 깊고 넓은 사색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고독한 인간의 방대한 성장 기록이다.
뒤러는 헝가리에서 이주한 가난한 금속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40세에 스승의 딸인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부모는 무려 1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알브레히트는 그중 셋째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뒤러의 아버지는 과묵한 사람이었고 엄격한 기독교인이자 성실한 기능인이었는데, 뒤러가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난 뒤 자연스럽게 자신의 공방에서 수련을 시켰다.
<13살의 자화상>[그림 1]은 이 어린 소년이 얼마나 신중하고 자신감에 넘쳤는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은필로 그려졌다. 은필(銀筆)은 강한 힘을 주어 선을 그어야 하고, 한번 그리면 지울 수 없는 매우 까다로운 재료였다. 그런데 소년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매우 분명한 필치로 자화상을 그리고, 짧은 메모를 남긴다. “아주 어린아이였던 1484년 나는 거울을 보고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 속 소년의 손짓이 보여주듯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밑에서 견습 생활을 마칠 무렵 뒤러는 돌연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그의 아버지는 아쉬워하면서도 아들의 길을 막지 않았다. 아버지 곁을 떠난 뒤러는 지역의 명망 있는 화가 볼게무트의 도제가 되어 3년을 지냈다.
우리가 이렇게 화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뒤러가 직접 자신의 개인사를 남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모의 얼굴을 화폭에 기록했다. 뒤러는 도제를 마치고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초상화[그림 2]를 그린다. 이 초상화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얼굴과 자세는 소심해 보이고 색과 선을 다루는 기교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무뚝뚝하지만 따뜻했음을 느낄 수 있다.
한편 뒤러가 중년에 그린 어머니의 초상[그림 3]은 시선을 피하고 싶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강렬하다. 뒤러는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를 책임졌고,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이 목탄화를 그렸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수많은 출산과 가난, 노동으로 쇠약해졌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한 정신력을 유지한 여성의 삶을 만날 수 있다.
뒤러는 19살에 이렇게 소중한 부모 곁을 떠나 숀가우어의 공방으로 갔다. 독일은 금속활자가 시작된 곳이었고 다양한 출판물의 삽화를 위해 판화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었다. 숀가우어는 당대 최고의 판화가였다. 하지만 뒤러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뒤러는 한동안 숀가우어의 형제들과 함께 지내며 자신의 예술의 자양분이 될 많은 기술을 습득한다. 그리고는 다시 독일 전역을 여행했다.
뒤러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결혼이었다. 뒤러는 관례대로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을 했고 얼마 안 있어 다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은 그의 여행이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뒤러는 자신을 인문주의적 학문과 수학, 일반교양을 익힌 지식인으로 생각했으나 그녀는 남편이 성실한 공예 기술자가 되어주길 바랐던 것이다. 지식인과 기술자라는 정체성은 병립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뒤러는 그 모든 것이었다.
뒤러는 일생 동안 이탈리아를 두 번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원근법과 기하학 등 다양한 이론을 공부했다. 또한 그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따라 다양한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법을 익혔다. 인문학자의 소양과 장인의 기술이 그 안에서 공존했다. 동시에 그에겐 놀랄만한 관찰력이 있었다. 도시 풍경, 토끼, 풀, 코뿔소에 이르기까지 그는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그렸다. [그림 4] 그런데 그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어떤 평론가의 말마따나 뒤러는 “스스로가 그 자신의 모나리자였다.” 다 빈치가 죽을 때까지 모나리자를 놓지 않았던 것처럼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놓지 않았다. 뒤러의 자화상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려졌다. 그는 인생의 마디마디마다 자화상들을 남겼고 제작 연도와 짤막한 글을 적어 넣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연 1500년에 그려진 자화상이다. [그림 5]
뒤러는 자신을 예수처럼 묘사했다. 짧은 수염과 정면을 응시하고 축복하듯 손을 들어 올리는 자세는 전통적으로 예수를 그리는 방식이었다. 한편 눈은 실제와는 다르게 더 크고 분명하게 표현했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는 한 올 한 올 인위적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린 황금빛 머리는 어둠 속에서 후광처럼 빛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정말 자신을 예수에 비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뒤러가 모피코트를 입을 만큼 재력이 있는 인정받는 화가였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뒤러는 북유럽의 유명한 화가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갔다. 당시의 명성 있는 화가들은 대부분 성당 제단에 놓는 채색 패널화를 주로 제작했다. 하지만 뒤러는 판화를 선호했다. 비용이 많이 드는 패널화는 대부분 후원자들이 원하는 대로 그려야 했다. 주제와 표현 방식도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도전적인 뒤러는 그런 도상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한 작업은 새로운 화면의 ‘창안’이었다.
1498년 뒤러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주제로 한 14점의 목판화를 엮어 책으로 제본한다. 성서의 본문은 뒷면에 인쇄되어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이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러 주었다. 이 판화집 안에는 놀라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용과 싸우는 천사 미카엘>[그림 6]도 그중 하나이다. 지상은 동화처럼 평화로운데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칼과 활을 들고 용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우아하고 경쾌한 천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긴 옷을 입고 있는 천사장 미카엘조차 긴 창을 들고 미간을 찡그린 채 힘겹게 용을 찌르고 있다. 뒤러는 악마와의 싸움은 결코 호락호락한 싸움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독자들도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뒤러는 판화를 통해 다양한 주제를 실험할 자유를 얻었고,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할 매체를 확보했다.
뒤러의 열정은 회화적 실험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전수할 이론서를 출판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의 책 <인체 비례론>은 이탈리아의 이론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직인의 아들이었고, 기술을 표준화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뒤러는 알베르티가 한 번도 도입한 적 없는 삽화를 자신의 책에 그려 넣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림 7]
이탈리아 화가들과 달리 뒤러는 이상적인 미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그가 남긴 비례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글자 그대로 다양한 비례를 적용한 다채로운 예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림 8] 그중 무엇이 표준이고, 이상적인 비례인지 뒤러는 결론 내리지 않았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이 화가는 겸손하게 고백할 뿐이다.
“아름다움,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