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이 그려낸 애처롭고 고단한 인간의 삶
회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특별했다. 예수와 성모, 성인과 성녀, 황제와 교황에 이르기까지 고귀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이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피터 브뢰헬(Pieter Brueghel, 1527~1569)의 붓은 다른 것을 그려냈다. 곡물 수확, 농가의 결혼식 등 농촌 사람들의 소소한 삶이 그의 화폭에 담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농민 화가’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농촌과 아무 상관도 없는 도시인이었다.
브뢰헬이 살았던 안트베르펜은 스페인의 통치를 받으며 엄청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고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종교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세계 무역이 번창해 나갔고, 상인과 은행가들이 계속 성장했으며 화가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혼돈과 풍요 사이에서 브뢰헬은 인간사에 대해 탐구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브뢰헬의 목가적인 화풍에 주목한다. 그가 전원의 풍경과 농민의 일상적인 풍속들을 그림에 담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의 화폭에서는 먹고 마시고 흥정하고 싸우는 어리석은 인간의 흉측한 모습이 확대되어 나타난다. 반면 순수하고 평온해 보이는 자연의 웅장한 풍경은 초라한 인간의 존재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농민의 결혼 잔치>[그림 1]가 벌어지고 있다. 장소는 허름한 곡물창고다. 결혼식을 위해 벽에 초록색 천을 걸어 소박하게 장식도 했다. 그 앞에 볼이 발그레한 신부가 화관을 쓰고 꿈꾸는 듯 앉아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귀여운 신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하객들은 저마다 먹고 마시는데 여념이 없다. 신부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딸 옆에 앉아 긴장된 모습으로 잔치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가장 전면에 있는 어린 아이는 빈 그릇을 안은 채 손가락을 빨고 있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기회만 되면 언제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모자에 숟가락을 꽂고 있다. 흥을 돋우기 위해 초대된 백파이프 연주자조차 음악 보다는 음식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가 아닌 술과 음식인 듯하다.
브뢰헬은 농가의 결혼식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농부의 복장을 하고 농촌을 돌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농민들은 분명 화가의 흥미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뿐, 사랑스러운 피사체가 되지는 못했다. 결혼 잔치는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그 중에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곡물 수확>[그림 2]의 소재도 농민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한다. 몇몇 남자들이 큰 낮을 휘둘러 밀을 베고, 허리를 깊이 숙어 여인들은 짚단을 묶는다. 하지만 시선을 끄는 이들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무 아래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다. 먹고 마시는 사람들. 이들이 가장 앞에 있고,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있는 색채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도 농민들을 생생하게 담아냈지만 여전히 사랑스럽게 그리진 않았다.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는 사내의 얼굴을 보라. 햇볕에 그을리고 노동에 지친 사내는 거나하게 취해 잠들었는데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화가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을까? 그건 아니다. 브뤼겔이 아름답에 담아낸 것은 자연이었다. 화가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풍요로운 밀밭과 마을 너머로 멀리까지 이어지는 언덕, 은은한 바다와 하늘의 풍경을 담아냈다. 대지와 물과 하늘.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애처롭고 고단한 생명체일 뿐이다.
브뢰헬이 그리는 인간은 대체로 무심하고 어리석다. <맹인들의 우화>[그림 3]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성서에서 비롯되었다. 마태 복음에는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사소한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복음 15장 14절)라고 응수한다. 이는 율법과 전통을 기준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인텔리들을 향한 비판이었다.
브뢰헬은 성서의 한 구절만을 따서 문자 그대로 그렸다. 맹인들은 펄럭이는 망토를 입고 줄지어 걸어간다. 앞사람의 지팡이를 잡거나 어깨를 잡고서 걸어가는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이들 중 선두에 선 사람은 이미 넘어졌고, 두 번째 선 맹인 역시 앞으로 엎어지고 있다. 바로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뒤에 오는 사람들 역시 이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애처롭고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다.
이로써 브뢰헬은 관람자에게 매우 어려운 숙제를 던져주었다. 이처럼 불쌍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동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할 것인가?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맹인들의 뒤편으로는 교회가 서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유식하고 고매한 척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 된다. 그와 동시에 종교의 가르침은 보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걸어가는 이들을 향한 훈계일 수도 있다. 이중 정답은 무엇일까? 화가는 답을 내려 주지 않았다.
브뢰헬은 이처럼 평면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모순적인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이카로스의 추락>[그림 4]도 그중 하나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매우 뛰어난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는 움직일 수 있는 날개를 만들어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아버지는 태양 가까이 가면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을 수 있으니 너무 높게 날지 말라고 아들에게 경고했으나 이카로스는 대담한 비상(飛上)에 매료되어 태양 가까이 올라갔다가 추락하고 만다.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을 제멋대로 사용한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는 이 신화를 브뢰헬은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이 그림에서도 가장 숭고하게 표현된 것은 역시 높은 곳에서 조망한 자연 풍경이다. 옥빛 바다와 하늘, 멀리 보이는 뾰족한 산들은 고요하고 숭고해 보인다. 한편 전경에서 농부는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 목동은 지팡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있고, 낚시를 하는 어부도 자기가 하는 일에 몰입해 있다. 바다로 추락한 이카로스의 다리가 보이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무역선으로 보이는 범선도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매우 이례적이고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인간의 삶과 노동은 미동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화가는 수수께끼처럼 관목 숲 사이에 산송장 같은 늙은 농부를 숨겨 놓았다.[그림 4-1] 비평가들은 이 부분이 “비록 사람이 죽더라도 쟁기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속담은 중의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쟁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인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화가는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또다시 우리를 이끈다. 동시에 우리를 고독하게 만든다. 고통과 상실을 계속해서 겪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하루치 노동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피터 브뢰헬은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의 삶을 꿰뚫어 보았고 성서와 우화, 신화와 속담을 오가며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담아 펼쳐 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울림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화가가 자기 시대의 통상적인 화풍을 벗어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