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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Dec 07. 2022

르네상스의 성전에 울려 퍼진 ‘심판의 나팔’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말년 - 매너리즘의 시작

‘거장들의 양식을 기계적으로 답습한 작품’, ‘균형과 조화를 잃어버린 채 기교만 남은 양식’, ‘부자연스럽고 왜곡되고 퇴폐적인 예술’. 오랫동안 매너리즘(mannerism)은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15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약 100년 동안 제작된 일련의 작품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상실한 작품들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매너리즘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자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특별한 예술 양식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고결한 인간상을 비웃듯 병적이고 이상한 인체들을 그려나갔고 화가들마다 제각기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분명 르네상스 양식이 자신들이 표현하려는 것을 담기에 부족하자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작 지점엔 르네상스의 가장 명망 높은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있었다.

    



<최후의 심판>, 모든 것을 집어삼킨 혼돈

그림1.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7-41, 프레스코, 1370 x 1220 cm,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정면을 가득 채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그림1]은 르네상스의 종말을 고하는 작품이다.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섬세하게 이룩한 단순함과 고요함은 사라졌다. 그림 전체에 흥분과 전율이 가득하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고 죽은 자들이 깨어난다. 그중 선한 이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악한 이들은 배에 실려 지옥으로 옮겨진다. 저승으로 가는 배를 모는 뱃사공 카론Charon은 인정사정없이 노를 휘둘러 죄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낸다. 천상의 성인들도 분주하다. 그들은 구원된 영혼을 끌어올리거나 심판하는 예수를 바라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느라 여념이 없다.


그림2. 미켈란젤로, <천지 창조> 부분,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2, 바티칸, 로마


이 그림은 시스티나 성당 벽면을 장식하는 다른 벽화들은 물론이고, 미켈란젤로 자신이 그린 천장화 <천지창조>[그림2]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원근법은 무너지고 인물들의 크기는 제멋대로다. 예를 들어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가 가장 크게 그려졌다. 덕분에 예수는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공간은 더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젊고 강하고 이상적인 인간상마저 포기해버렸다. 인물들의 허리는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두꺼워져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천상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몸은 흐느적거리고 윤곽은 불명료하다. 개개인의 형상보다 무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덩어리가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림1의 부분.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부분


이 혼돈 속에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그림1의 부분] 예수의 왼발 아래에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는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당하며 순교한 성인이다. 그가 들고 있는 가죽에는 화가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들어있다. 이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라는 예술가가 갖고 있었던 위상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르네상스는 인체를 그리기 위해 해부학을 연구했던 시대였다. 외부가 아니라 골조, 외피가 아니라 뼈대가 형상의 핵심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이 자기 얼굴을 비어있는 가죽에 그려 넣은 것이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라도 천국에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육체는 허울이 벗겨지고 세상은 절망스러워도 영혼만은 구원에 이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파괴된 로마Rome, 부서진 르네상스의 신념


미켈란젤로는 이후에도 역동적이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그려나갔다. <성 바오로의 개종>[그림3]에는 조화와 질서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늘에선 번개 같은 광선이 내려오고 바오로는 말에서 떨어져 눈도 못 뜨고 있다. 사람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을 향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화면은 군데군데 비어 있는데,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형상은 예수도 바오로도 아닌 놀라서 앞발을 들고 있는 말의 뒷모습이다. 이 그림은 바오로의 개종이라는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그저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미켈란젤로를 이렇게 혼돈과 절망에 빠지게 했을까? 무엇이 미켈란젤로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전적인 형상들과 멀어지게 했을까?


그림3. 미켈란젤로, <성 바오로의 개종>, 1542-1545, 프레스코, 625 x 661 cm, 파올리나 예배당, 바티칸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에서 자라나 바티칸에서 활동한 예술가였다. 그런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어 가톨릭은 그 기세가 꺾였다. 초기 인문학자들의 신플라톤주의가 교회에 불어넣은 활기찬 에너지는 교황의 무능력과 실책으로 사그라져버렸다. 게다가 1527년에는 악명 높은 로마 약탈이 자행되었다. 로마는 카를 5세(Charles V, 1500~1558)의 군대에 의해 비참하게 부서졌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신교도와 전쟁을 벌이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현실적인 실리를 따라 성스런 도시를 파괴했다. 바티칸은 군인들의 막사가 되었고 성 베드로 성당은 마구간으로 이용되었다. 황제는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의 주인도 바꿔버렸다. 그런 이후에도 카를 5세는 여전히 가톨릭의 수호자로 군림했다. 이 사건은 황제의 도덕이 일반인의 도덕과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현실 정치의 필요에 따라 황제의 행동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로써 미켈란젤로가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깨어졌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신플라톤주의에 기반하고 있었고, 피렌체와 로마는 그의 활동무대였으며, 피렌체의 공화주의와 종교적인 금욕주의는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현실주의 앞에 무너졌다. 신의 정신에 따라 펼쳐진 세상이 있고 인간은 지혜를 통해 신에 다다를 수 있다는 르네상스의 신념은 녹아내렸다.


그림4. 미켈란젤로, 론다니니 피에타(미완성), 1552-64, 대리석, 높이 195 cm


그런 가운데 노년에 이른 미켈란젤로는 더욱 종교적이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이 위대한 조각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돌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론다니니Rondanini 피에타>[그림4]는 그가 12년 동안 품고 있었던 작품이자 사망하기 엿새 전까지 매진했던 작품이었다. 이 조각에는 육체라고 부를만한 물질적인 요소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근육도 없고 표정이라고 부를만한 표현도 없다. 다만 성모와 예수가 서로 기대어 서있을 뿐이다. 죽은 아들이 어머니에게 기댄 것인지 어머니가 죽은 아들에게 기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사람을 끄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최후의 심판>을 통해 ‘미’의 이념들을 파기하고 르네상스의 몰락을 보여준 미켈란젤로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통해 물질적인 대상을 묘사하지 않고서도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영혼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그는 그렇게 동요와 불안과 회의 속에서도 초감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매너리즘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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