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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Dec 02. 2022

한스 홀바인, 초상화에 숨겨진 수수께끼

당신은 다른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는가

고대 그리스 코린트에 살았던 디부타데스(Dibutades)는 이웃에 사는 청년을 무척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연인을 곁에 둘 수 없게 된 여인은 그의 그림자를 본떠 그림을 그린다. 초상화란 이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아 두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즉, 누군가의 부재를 부정하려는 애처로운 시도였다.


한편 고대 로마에서 황제의 초상은 국가의 이미지였고 정치적 홍보물이었다. 로마 제국은 대리석상과 동전에 황제의 얼굴을 새겨 보이지 않는 권력을 신민들이게 보여주었다. 황제의 시대가 저물고 종교의 시대인 중세가 열리자 초상화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기독교는 육체보다 정신을 강조했고 현세 보다 내세에 의미를 두었다. 그런데 르네상스라고 명명되는 인문주의와 인간의 시대가 열리자 초상화는 다시 중요한 회화 장르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는 로마 시대와는 다른 목적을 가졌다. 이 시대 화가들은 왕의 초상이 아니라 인간의 초상을 그리고자했다. 그들은 한 개인의 본질과 자질을 간파하고 그의 외적 개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까지 담아내려고 노력하였다. 이 어려운 과제를 탁월하게 해낸 사람이 바로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1543)이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한 진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가진 화가였다.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북유럽의 사실주의


한스 홀바인은 독일 남부의 아우구스부르크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능력 있는 종교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Hans Holbein the elder; 1460~1524)는 아들에게 화가가 갖추어야할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장성한 이후 홀바인은 고향을 떠나 학문의 중심지인 바젤에 머물렀다. 그는 뒤러와 같은 선배들이 열정적으로 연구한 비례론이나 원근법과 같은 지식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림1.  한스 홀바인, <성모자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 1528년경, 제단화, 목판에 유채, 다름슈타트 성(城) 미술관


<성모자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그림 1]는 이 뛰어난 화가의 탁월한 재능을 잘 보여준다. 성모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고전적인 형태의 벽감 안에 서있다. 그녀의 고상한 얼굴과 우아한 자세는 이탈리아의 대가들이 그린 성모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성모의 발아래에는 마이어 시장과 그의 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홀바인은 좌우 대칭으로 봉헌자의 가족들을 배치하여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화면을 만들었다. 이렇게 우아하고 균형 잡힌 구성이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이라면 성모의 화려한 금관과 카펫의 세세한 묘사 등은 북유럽 미술의 전통이었다. 이탈리아 미술의 고전주의와 북유럽 회화의 사실주의가 모두 홀바인의 손 안에 있었다.

홀바인은 성모를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봉헌자를 묘사했다. 봉헌자의 가족은 매우 경건한 자세로 성모자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얼굴은 어디서도 본적 없는 개성 있는 얼굴이다. 화가는 의뢰자를 표준화된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지 않았다. 대신 뛰어난 관찰력으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평범한 가장의 얼굴을 보고 정성들여 기록했다.


홀바인이 이렇게 탁월한 제단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북유럽에서 화가들이 설 자리는 매우 좁아져 있었다. 종교 개혁은 종교 전쟁으로 번졌고, 152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바젤에선 종교화를 파괴하는 최악의 폭동들이 벌어졌다. 더 이상 종교화는 화가의 수입원이 될 수 없었다. 북유럽에서는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실내를 장식하는 일도 흔치 않았다. 강경한 일부 신교도들은 실내 장식을 사치로 여겼으며, 북유럽의 기후와 건축양식도 벽화를 그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화가에게 남겨진 일은 책의 삽화를 그리거나 초상화를 그리는 일 정도였다.


에라스무스[그림 2]는 이 뛰어난 화가가 영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는 토머스 모어에게 홀바인을 소개하는 편지에 “여기에서는 예술이 죽어가고 있소”라고 적었다. 토마스 모어[그림 3]는 자신의 가족들의 초상화를 홀바인에게 의뢰했다. 덕분에 홀바인은 영국에서 화가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얼마 후엔 헨리 8세의 공식 궁정화가로 임명된다.  


좌) 그림 2. 한스 홀바인, 집필 중인 에라스무스의 초상, 1523년 / 우) 그림 3. 한스 홀바인, 토머스 모어의 초상, 1527년


헨리 8세는 장미 전쟁을 종결시키고 튜더 왕조를 시작한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강력한 전제군주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무려 6명의 왕비를 갈아치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고, 교황청과 갈라서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홀바인은 이 변덕스럽고 권위적인 황제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그림 4.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초상>, 1536년경


<헨리 8세>[그림 4]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듯 보석이 잔뜩 박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모피와 부푼 소매로 잔뜩 과장된 왕의 어깨는 절대 권력자의 흔들림 없는 위치를 보여준다. 한편 작은 입과 가는 눈썹 등은 단호하고 완고한 성격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겸손, 타협, 여유를 모르는 대담한 왕은 작은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홀바인은 이렇듯 인물의 외양뿐만 아니라 영혼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눈을 지니고 있었다.    


   



원근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해골을 던지다


사물과 인간을 두루 잘 표현하는 홀바인의 장점은 <대사들>[그림 5]이라는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그림을 의뢰한 사람은 영국으로 파견된 프랑스 대사로 헨리 8세가 교황청의 명을 어기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인물이다. 모피를 입고 있는 주문자는 주교인 친구와 함께 동양풍의 양탄자가 깔린 가구에 팔을 기대고 서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천구의와 지구의, 해시계와 컴퍼스 등 각종 기구들이 놓여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새로운 지식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조화를 상징하는 악기 류트의 줄이 끊겨 있다. 이는 종교적 갈등이 심화된 유럽 세계를 상징한다.

그림 5.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국립미술관, 런던


이 그림의 가장 흥미로운 형상은 가구 아래 비스듬히 그려진 해골이다. 정면에서는 알 수 없는 물체처럼 보이는 해골은 그림을 비스듬히 놓으면 그 형체가 드러난다.[그림 5-2] 이렇게 특별한 시점에서만 볼 수 있는 형상을 ‘왜상歪像(anamorphosis)’이라고 한다.


그림 5-2 측면에서 바라본 <대사들> 부분


<대사들>에 숨겨진 왜상은 르네상스 회화가 이룩한 가장 큰 성과인 원근법을 해체했다. 원근법은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에 담기 위해 수학적으로 공간을 재단한다. 화가는 고정된 자리에서 대상을 보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대상을 그린다. [그림 6] 원근법은 세상을 명징하게 보려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그려진 그림은 관람자에게 하나의 시점을 강요한다. 그것은 화가가 보는 대로 보고, 남들이 서는 자리에 서는 ‘정상인’이 되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하다. 그런데 홀바인은 원근법적으로 잘 구현된 그림 안에 정면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물체를 그려놓았다.


그림6. 알브레히트 뒤러, <컴퍼스와 자에 의한 측정술 교본> 중 <여인을 그리고 있는 화공>,1525년 출판, 목판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은 그 정상인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질문한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올바른 자리는 어디인가? 정면에서 보면 해골이 일그러지고, 측면에서 보면 인물과 다른 사물들이 일그러진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보이는 세계도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왜상일 뿐이다. 그런데 정면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관람자는 눈앞에 놓인 해골(죽음)을 부정한다. 그것은 잘못 그려진 것이고, 비정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한번 해골을 본 사람은 다시 정면으로 돌아와도 숨어있는 해골의 존재를 잊지 못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끌고 그림 옆으로 가서 자기가 본 진실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16세기, 가톨릭(catholic-‘보편’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는 부패했고, 부패한 교회에 맞섰던 신교(protest-‘항의하다’라는 뜻)는 과거의 유산을 우상이라고 파괴해버렸다. 교황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던 헨리 8세의 이혼을 비정상으로 규정했고, 왕은 교황과 절연하면서 자신을 뜻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하들을 처형했다. 그중엔 홀바인이 영국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왔던 토머스 모어도 있었다. 이런 시대를 관통하며 인간을 관찰해 온 화가 한스 홀바인은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이 공존할 수 있음을 왜상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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