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 지성의 한계와 표현의 자유
“이제 그런 거 볼 나이는 지났어요.”
아이가 한 살 두 살 커나가다 보면 유아기 때 보았던 아름답고 착한 동화의 세계가 허구였다는 걸 알게 된다. 폭력과 광기, 격정과 욕망이 거세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어른들이 다듬어 놓은 어린이 버전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아이들은 그런 아름다운 세상보다는 위태롭고 위험하더라도 보다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와 만나길 원한다.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이 그와 같았다. 그들은 르네상스가 구현한 긴장감 없는 균형이 진리를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다. 원근법으로 공간을 수학적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사라졌다. 세계는 그렇게 파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성의 한계는 명백해졌다.
고전주의 이념의 붕괴는 미켈란젤로에겐 불안으로 느껴졌겠지만 새로운 화가들에겐 자유를 안겨 주었다. 화가들은 불안한 정세 속에서 삶의 공허함을 대면하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할 수단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때로는 난해하고 괴상한 형상을 만들어 현실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켰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고전주의 형식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정신적 비전을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1494 ~ 1556)의 그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그림 1]에는 지구와는 다른 중력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모방한 것이지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받치고 있는 청년의 발은 땅 위에 살짝 닿았을 뿐이다. 성모와 성녀들은 천상도 지상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다. 공간은 깊이를 잃어버렸다. 인물의 크기를 거리에 따라 세심하게 조절하는 원근법은 찾아볼 수 없다. 소실점은 사라졌고 단축법은 보이지 않는다.
인물들의 정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청년들은 슬픔보다는 당혹감에 휩싸여 있고, 성모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넋을 잃었다. 몇몇 이들은 눈에 초점이 없고, 다른 몇몇은 화면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명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옷은 가볍게 부풀어 올랐다. 유려하게 흘러내리며 인체의 굴곡을 따라 주름지던 고전적인 표현은 사라졌다. 옷감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자신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색은 또 어떠한가? 일찍이 이렇게 산뜻한 색조의 그림은 없었다. 분홍색과 연한 푸른색은 불안정하지만 행복한 꿈처럼 화사하다.
이 그림은 모순적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내리는 과정은 중력 때문에 생기는 무게와 씨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그것이 없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주제와 화사한 색조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화가는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위해 이런 모순을 받아들였다.
폰토르모의 인물들이 보여주듯 매너리즘 회화의 인물들은 황금비 따위는 무시하며 길쭉하게 늘어나있다. 이런 형태의 극단에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본명: Girolamo Francesco Maria Mazzola, 1503~ 1540)의 <목이 긴 성모>[그림 2]가 있다. 화가는 의식적으로 전통적 수법을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 그림은 이상한 것 투성이다.
우리는 성모의 키가 얼마나 되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아기 예수는 엄마 품에 안기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천사들의 비례 역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전면에 서 있는 천사의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게다가 파르미자니노는 좌우 균형을 무시하고 천사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버렸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피부와 반짝이는 머릿결을 가졌지만 자신들이 정확이 무엇을 위해 그곳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천사들의 눈은 응시할 곳을 찾지 못했다. 천사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 아기 예수는 <피에타>의 죽은 예수처럼 축 늘어져있다. 성모 역시 아기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꿈에 잠겨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배경 보이는 꼭대기 없는 기둥은 왜 그렇게 거기 있는 것일까? 선명하게 보이는 건 하나뿐이지만 아래를 보면 기둥이 여러 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모가 있는 곳과 기둥들이 늘어선 공간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화가는 그렇게 애매한 공간에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있는 작은 남자를 세워두었다. 그는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보급한 성인 히에로니무스로 성모 신앙을 고취시키는데도 일조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성서를 연구하는 모습으로 성모자상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히에로니무스는 어딘가 이상하다. 그는 두루마리도 성모도 아닌 외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이상한 것 투성인데도 매우 우아하고 장대하다는 것이다. 성모의 기울어진 고개와 길어진 손가락, 살포시 쿠션 위에 있는 발까지 매우 섬세하게 디자인되었다. 이 그림은 성화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시각적 유희를 즐기기엔 충분하다. 유려한 선과 반작이는 표면, 기괴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들은 이상하지만 매혹적이다. 그런 이유로 이 그림은 메시지가 아니라 형과 색의 유희를 즐기는 “미술을 위한 미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폰토르노와 파르미자니노는 르네상스의 화가들과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피렌체와 로마의 궁정에서 활약했던 뛰어난 화가였으나 그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자신의 그림만큼이나 기이한 삶을 살았다. 폰토르모는 신경증과 우울증으로 죽음의 공포와 씨름했다. 화가는 자신이 직접 세운 높은 집에서 혼자 살며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다. 누구든 그의 다락방에 들어가려면 그가 직접 내려주는 사다리를 기다려야 했다.
파르마지노는 신경질적이고 비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돈을 물 쓰듯 썼으며 우울증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연금술에 심취했다. 몇 년 간의 궁정 생활을 마치고 고향마을로 돌아가서는 매너리즘 양식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목이 긴 성모>도 그때 그려졌다. 그는 3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이 작품을 품고 있었는데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매너리즘 화가들의 삶은 만능인으로 존경받으며 귀족처럼 영예를 누렸던 르네상스 화가들과 비교하면 위태롭고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삶은 궁정의 격식으로부터 벗어나 삶을 통찰하고 새로운 진리를 찾으려는 힘겨운 노력처럼 느껴진다. 유아기를 벗어난 아이가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매너리즘 화가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불안한 세계를 두고 르네상스의 질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대신 이들은 불안과 허무를 견디며 비대칭적이고, 모순적이며, 불안정한 작품을 통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또 다른 모습임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