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사랑을 알아?

사랑, 그게 뭐 별거라고

by RayKwon

#_


거실 소파 가운데 자리는 엄마 외에 누구도 앉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그것은 우리 가족의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식사 후 설거지가 으레 엄마의 몫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엄마에게는 바쁜 집안 살림을 올 스톱하고 반드시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때가 정해져 있었다. 잊지 않고 챙겨보는 아침 드라마와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방송 시간이 그 '때'이다.


아이고, 저거 봐라. 어머나 어머나, 세상에. 이야~

엄마의 탄성 섞인 혼잣말은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볼 때 그 빈도가 높아졌다. 집순이 우리 엄마. 다리가 아파서, 허리가 아파서,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수만 가지의 이유로 여행은커녕 외출도 많이 하지 않는 그녀.

엄마, 그게 그렇게 재밌어?

그럼 야, 저거 봐라. 저 맨발로 진흙탕을 저래... 어머나, 쟤네는 밥을 저렇게 먹네...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을 한 엄마가 커피믹스를 후루룩 들이키며 눈이 빠져라 티브이를 바라봤다. 순간 내 입에선 늘 그녀에게서 듣던 익숙한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티비로 들어가겠네...


내가 젊었어봐라, 야. 다리만 안 아팠어도, 허리 수술만 안 했어도. 나도 저런데 가방 들처메고 막 쏘다니고 싶다. 어렸을 때는 뜀박질도 아주 잘했어. 맨날 담장 뛰어넘고,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노는 고무줄 자르고 도망가면 뒤쫓아가서 혼쭐을 내줬지. 여행? 그때 그런 게 어딨어. 너네처럼 비행기 타고 막 다닐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공부는 어찌나 하기 싫던지. 내가 그래서 너 공부 못했어도 뭐라 안 했잖아.


엄마의 눈길은 여전히 '걸어서 세상 속으로'를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저 너머 '희미한 기억 속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이젠 아줌마를 넘어 한참 할머니가 되어버린 꼬불머리 우리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 역시 엄마의 자리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나이를 먹고 나니 엄마와의 대화가 한창 더 재밌어졌다. 엄마와 딸이 아닌, 여자들의 대화.


느이 외할머니가 젊어서 과부가 되었어도 억척스럽게 돈을 잘 모았어.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내가 기어 다녔는데, 마지막 며칠 남았을 때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자꾸 할아버지 얼굴을 쓰다듬어 주더래. 그 모습이 밟혀서, 과부라도 자식들 잘 먹고 잘 입히려고. 할머니가 안 해 본 장사가 없지. 나? 어려서 내가 뭐 그런 철이 있나. 돈 생기면 맨날 양장점 가서 옷 빼 입고 구두 사고. 그때는 멋쟁이였어, 내가.

안 믿겨? 기지배. 니네 키우면서 아끼느라 그렇지, 지금은. 니네 아빠가 옷 한 벌이라도 시원하게 사주는 남자인 줄 아니? 짠돌이 짠돌이, 그런 짠돌이가 어딨냐. 연애? 나는 천방지축이기나 했지, 연애는 할 줄도 몰랐어. 중매였지, 중매.


그러니까 말이야. 뭐하러 아빠랑 결혼을 했어. 혼자 멋있게 살지.


아빠 당숙이 엄마 먼 친척의 친구였어.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사람 있다고. 집안이 여유는 좀 없어도 사람이 아주 성실하고 괜찮다고 했지. 다방에서 차 한잔 하고, 밥도 한번 먹고, 영화도 한번 보고. 몇 번이나 만났나, 그리고 바로 결혼했지.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어서 니 아빠 그 쭉 찢어진 눈이 잘생겨 보이더라니까. 삐쩍 꼴은 모습을 보고 내가 저 사람, 사람 몰골 좀 만들어 놓아야겠다, 싶었지. 원주에서 식을 올리고 시댁을 가는데, 읍을 지나서도 한참이 돼서야 집이 보이는 거야... 아이구야, 말도 마라. 집안 여유가 좀 없는 게 아니라 다 쓰러져 가겠더라.


가난한 집 칠 남매의 장남. 우리 아빠 술만 마시면 나오는 레퍼토리잖아.


내가 생각해도 참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이었는데, 갑자기 가난한 집 맏며느리 되어서 시집살이를 하려니 죽겠는 거야. 신혼부터 니 아빠랑 막 말도 안 하고 그랬어. 그래도 출근길마다 도시락은 꼬박 챙겨 들려 보내고 살이나 좀 찌지, 하고 속엣말 하면서 지켜봤지. 젊어서도 굽은 등이 사람 참 측은하게 만들더라니까.

느이 할머니는 좀 깐깐한 양반이었냐... 살림을 잘한다 못한다 훈수도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내가 하루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어머니, 저 좀 나갔다 올게요, 하고 읍내를 나갔어. 버스 터미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어. 그때 내가 티비 속 저 양반처럼 막 돌아다녔으면 했는데, 니 아빠 퇴근 시간 되니까 발길이 집으로 돌아가더라. 그게 니 언니 낳기 전이니까... 몇 살이더라... 스물 넷인가...


스물넷. 한 여름 햇살처럼 싱그러웠을 엄마. 엄마에게도 나보다 젊었던 시간이 있었지.

엄마는 그래서 결혼을 후회하진 않았어? 만삭까지 밭일하고, 장남인데 손자 못 낳았다고 눈치 받고. 그것도 한창 예쁠 나이에. 난 그냥 혼자 살래. 여행도 막 다니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엄마처럼은 못 살아.


혼자든 둘이든 능력이 있어야지, 이것아.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면 좋고, 혼자라도 잘 살면 것도 좋고.

나는 짠돌이 니네 아빠 성실함 하나만 믿었어. 외할머니가 맨날 못 사는 막내딸 불쌍해서 쌈짓돈 쥐어주고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주문을 외다시피 했지. 권서방, 사람이 좋아서 잘 될 거야... 그게 느이 외할머니 입버릇이었어.

시집살이 끝내고 처음 단칸방 월세를 시작했는데, 그때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니 아빠 월급 명세서 더미가 나오는 거야. 가계부만 빼곡하게 적는 줄 알았더니 그 종이 쪼가리를 매달 차곡차곡 잘도 모아뒀더라. 그날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아빠 하는 말이, 수고했어, 좀만 더 고생해... 돌아누운 그 굽은 등이 얄미운 건지, 안쓰러운 건지, 갑자기 막 눈물이 나데...

사랑? 니 아빠 사랑하냐고? 난 몰라, 그런 거. 내가 암만 챙겨줘도 이렇게 다 늙도록 살이 안 찌는 게 속상하다 하면 그거 사랑이냐?


나의 사랑 타령이 우스웠는지 엄마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사랑? 난 몰라, 그런 거. 새침한 소녀 같은 말투 뒤에는 엄마의 수줍음이 숨어 있었다. 여자는 여자가 보면 안다. 이 사람, 사랑에 빠져있는가를.




거실 소파 한가운데. 엄마와 내가 살갑게 앉아 티브이를 본다. 오늘은 세계 테마 기행, 아이슬란드 편.

이야~ 저거 봐라. 저 눈 쌓인 거 좀 봐라. 아이고...

막내딸 결혼식을 몇 주 앞두고 열 시간 남짓 걸려 밴쿠버를 처음 방문한 엄마의 마음은 어딘가를 또 떠나고 싶은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만 죽어라고 연습했던 캐네디언 사위도 어느새 말끝마다 이야~ 아이고~를 연발하게 만드는 엄마의 입버릇. 지난 십 년 사이 드문 드문 보아온 엄마의 얼굴은 주름과 함께 조금씩 변해갔지만, 그 말투와 입버릇만큼은 여전하다. 가만히 바라보니 커피믹스를 후후, 불고 있는 엄마의 표정이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야, 세상 참 좋다, 응? 여기가 밴쿠버냐 한국이냐. 이렇게 한국티비도 막 보고, 커피믹스도 마시고. 우리 사위가 내 말길만 알아듣고 한국말로 대답만 할 수 있음 좋을 텐데... 난 몰라, 그냥 막 한국말하는 거야. 마음이 통하면 이해하겠지 뭐, 그치?


엄마 딸래미, 늦게라도 결혼한다니까 안심돼?


왜, 혼자서 멋있게 산다매? 잘 살면 돼. 혼자든 둘이든, 한국사람이든 외국사람이든. 나는 우리 사위 착해 보여서 참 좋다. 남자는 성실하고 착해야 해.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더라. 니 외할머니한테는 내가 그런 자식이었는데, 나한테는 너가 그래.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먼데까지 와서 살어 그래... 어쩌겠어. 난 이제 사위만 믿는 거지. 둘이서 서로 의지하고 잘 살겠지, 하고 믿어야지. 잘 살아라, 잘 살아라... 힘들 때도 사랑하고, 좋을 때도 사랑하고.


'세계 테마 기행' 속 아이슬란드를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가 싶더니 이내 창밖을 향한다.

이야, 날씨 참 좋네. 캐나다는 나무도 참 크다, 그치? 커피 다 마시고 우리 산책이나 가볼까...

현실 속 여행이 낯선 엄마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기만 하다. 집 앞 나무 한 그루, 길가 꽃 한 송이가 태어나 처음 보는 식물들인 것처럼. 집순이 우리 엄마도 나와 다를 바 없이 세상 풍경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 엄마, 우리 아빠 일어나면 같이 산책 가자.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잠깐 쉬고. 엄마랑 아빠랑, 나랑 신랑이랑. 우리 더블데이트하러 가자.



잘 살게, 엄마.

엄마 아빠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IMG_9449.JPG 캐나다 여행, 엄마의 마음에 담겼을 어느 날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