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1991년, 수원
악!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짓궂은 장난을 벌이던 같은 반 아이가 성곽 주변의 작은 구멍에 몸이 끼어버렸던 것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아이와 이를 바라보던 우리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학교에서 떠난 단체 성곽 여행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앞서 걷던 선생님보다 먼저 다가온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던 것은. 그는 서슴없이 깊게 파인 구덩이를 걸어 들어가 아이의 몸을 쑥 건져 올렸다. 이후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함성을 질렀다.
와!
하지만 그것은 영웅을 위한 함성이 아니었다.
와! 흑인이다! 씨꺼먼쓰다!
그것은 국민학생이었던 우리가 티브이에서나 보던 외국인, 당시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흑인을 만났을 때의 반응이었다. 몇몇 개구쟁이 아이들은 그의 손을 만져보려 달라붙었고 우리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듯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선생님이 아이들을 저지했을 때서야 주변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흑인은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아이가 구멍에 빠져서 다칠 뻔했어요.
눈을 감고 들으면 외국인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아주 또렷한 한국어였다.
#_ 2007년, 서울
신촌의 작은 스터디 카페.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분명 일본인과 수업하는 모임이라고 했는데 인사를 나누어보니 모두 한국인인 듯했다. 아무렴 어때, 어차피 초급인걸. 그때 한 명의 여자가 카페로 들어왔다. 그녀의 화장법과 옷차림새에는 영락없이 일본인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 드디어 센세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오늘 좀 늦었네요? 그럼 이제 다 왔으니까 수업 시작할까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야근의 고충과 불금의 소주를 논하던 그는 일본어 동호회의 센세였다.
야마토는 한국생활 7년 차, 나와 동갑내기인 일본인이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국어학당에서 공부를 하고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을 시작했다. 가진 돈은 많지 않았고 월급은 턱없이 적었던 초창기 외국 생활. 그는 집을 구하는 대신 회사 사무실에서 작은 매트를 깔고 잠을 잤다. 생활은 빠듯했지만 누군가를 돕는 일이 좋았고 쑥쑥 늘어가는 한국어 실력도 만족스러웠다. 딱히 귀국 날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한국에 머물 계획도 아니었다.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한국인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터디 모임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열렸다. 3살짜리 딸을 둔 가장이었던 그는 소중한 주말의 일부를 그곳에 반납했다. 회비는 1회에 4천 원. 이는 우리가 장소를 대여하고 간단히 차를 마시는 비용이었다. 야마토는 어떠한 수고비도 받지 않았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들고 나는 자리도 많았지만 그만큼 정예 멤버들도 늘어났다. 그중 누군가가 일본어 능력시험 대비반을 제안했고 야마토는 시험 때까지 화, 목 퇴근 이후에도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정해진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그가 준비한 간단한 테스트를 거쳤다. 주말에는 단어시험 점수가 가장 낮은 사람이 술을 사기도 했다. 유일한 유부남이었던 야마토가 수업 이후 뒤풀이를 참석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스터디 멤버들은 자연스레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가 없어도 알아서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야마토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우리 때문에 고생하는데 술이라도 한잔 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야마토는 가정이 있잖아. 집에서 식구들이랑도 시간을 보내야지.
술자리는 우리끼리가 편해. A가 아무리 한국인 같아 보여도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이라니까. 생각하는 게 달라서 이런 자리는 서로 불편해.
어떤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는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그 의견에 수긍하는 듯했다. 평소 우리는 모두 야마토의 놀라운 한국어 실력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모습에 감탄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야마토는 어쩔 수 없이 우리와는 다른 이방인이었다.
제법 춥고 비마저 내렸던 화요일 퇴근길.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갈까하고 고민을 하던 나는 마지못해 약속된 수업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예정보다 삼십 분 가까이 늦게 도착한 그곳에는 야마토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뭐야, 아무도 안 온 거야?
응. 못 온다고 한 사람들이 있긴 한데, 혹시 연락 안온 사람들이 늦게라도 올까 봐 기다리고 있었어.
불편한 마음으로 맞은편에 앉아 책을 꺼낸 나와 달리 그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사람들이 못 온다고 하면 그냥 너도 오지 말지 그랬어.
괜찮아. 어차피 약속된 시간이었으니까. 내가 아예 오지 않았으면 너도 그냥 돌아갈 뻔했잖아.
약속된 시간이라는 야마토의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시렸다. 나라면 잔뜩 짜증이 났을 텐데 그는 정말 괜찮은 듯했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었다. 어떠한 보상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일본어를 가르치는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 남의 나라인데 마음이 참 편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받은 만큼 어떤 식으로든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_ 2019년, 밴쿠버
야마토는 일 년쯤 뒤 일본어 수업을 그만두고 직장도 옮겼다.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하루하루는 한국의 여느 가장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봉사활동 단체에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듯했다. 간간이 그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남의 나라인데 마음이 참 편하더라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야마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불편함 없는 실력의 한국어였을까, 익숙해진 한국의 문화였을까. 아니면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야마토, 그리고 이곳에서 또 다른 야마토로 살고 있는 나. 우리는 언젠가 이방인이 아닌 현지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 대답은 어쩌면 이방인과 현지인 모두에게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맞닿는 어느 순간, 그래서 더 이상 낯선 땅의 삶이 낯설지 않을 때. 우리는 모두 현지인이 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