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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Mar 31. 2019

피구


#_ 만만한 운동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피구 같은 것. 기왕이면 진짜 공 대신 모래주머니를 던져주면 좋겠고.


집순이에게도 그런 날이 있다. 몸도 마음도 욱신거려서 도저히 안 되겠는, 그런 날이. 그런데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다운타운의 핫한 브런치를 먹기 위해 단장할 만치의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룸메이트들이 제안한 비치 발리볼을 할 만큼의 신체적 여유는 애초에 타고나지 않았고. 그때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 'dodgeball drop in class'였다. 음, 이것이 서구판 피구로구나. 클릭 한방으로, 집순이는 그렇게 주말 외출을 감행했다.


여기저기서 빠르게 튕겨 다니는 공과 무릎 보호대까지 완전무장한 선수들. 커뮤니티 센터의 강당에 들어선 순간 본 풍경은 내가 생각한 피구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잘못 왔다.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돌아가자. 닷지볼하러 왔지? 여기 종이에 이름 먼저 적어줄래?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나를 발견한 담당자가 펜을 건네며 말했다.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나는 엉겁결에 이름을 적고 벤치 구석자리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연습 중인 사람들을 관찰했다. 팡. 저 앞에 덩치 큰 남자가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졌다. 팡. 공은 벽을 맞고 (나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빠르게 튕겨나갔다. 남자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전투를 앞둔 투사 같았다. 저 사람도 힘든 일주일을 보냈나 보군. 줄을 잘 서서 같은 팀이 되어야겠다. 그의 상대편이 되어서 저 공을 맞고 전사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_ 피할 곳이 없었다. 공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랄까. 다음엔 차라리 비치발리볼을 하러 갈련다.


피구는 어린 시절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알았던 운동 종목이었다. 체구가 작았던 나는 상대팀의 중요 타깃이 아니었고, 어영부영 같은 팀원들 사이에 끼어 있다 보면 쉽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주자가 되곤 했다. 공을 잘 피했다기보다, 처음부터 공이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모래주머니 대신 여섯 개의 공들로 경기를 진행하는 닷지볼은 달랐다. 팡. 예의 덩치 큰 남자가 던진 공이 내 어깨에 맞았다. 팡. 이번엔 다리. 팡. 피한다고 했는데 또 손끝이 닿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전쟁 영화 속 엑스트라처럼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픽픽 쓰러져갔다.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팀이 되었어야 했는데. 나를 제거한 덩치남은 경기장을 신나게 활보하고 있었다. 그냥 집에 돌아갈까. 예정된 두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오늘 재미있었어? 전투를 이기고 돌아온 덩치남이 내게 물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던 그와 달리 나는 쌀쌀한 기운에 외투까지 입은 참이었다. 경기장을 활보할 겨를이 없었던 엑스트라는 땀이 나지 않았다. 응. 재미있었어. 내 입에선 너도 알고 나도 알만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일일 참여할 수 있는 경기가 몇 번 더 있는데, 정보 좀 알려줄까? 몇 번 더 해보면 룰도 익숙해지고 재밌을 거야. 남자가 씩 웃자 이마의 땀이 투두둑 떨어졌다. 착하게 생긴 눈이 같이 웃고 있었다. 그래? 그럼 좀 알려줘. 우리는 서로의 번호를 교환했다. 그도, 나도, 사실은 더 이상 일일 참여가 가능한 경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_ 정말 형편없었어요. 그녀를 안 맞히려고 하는 것은 경기를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니까요. 처음 만난 날 제가 던진 공으로 얼굴을 맞았다면 이런 얘기를 할 오늘이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웨딩 리셉션에서 그는 우리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그는 벤치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나를 발견했다.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온 듯했고 그다지 운동신경도 있어 보이진 않았다. 챙겨줘야겠단 생각을 했다. 팡. 공으로 때리고 싶진 않은데. 팡. 그의 마음과 달리 공은 자꾸 나를 향했다. 나는 형편없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공을 못 피하는 것인지. 그는 내가 안쓰러웠다고 했다. 옆으로 묶은 곱슬머리도 마음에 들었고. 나는 머리를 감기 귀찮은 날 옆으로 묶어버린다는 말을 굳이 더하지 않았다.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닷지볼 경기. 그날 무섭게 공을 던지던 상대팀의 덩치 큰 남자와 나는 이제 인생 경기의 한 팀이 되어 있다. 피구왕을 꿈꾸는 그는 여전히 일주일에 두세 번씩 경기를 하러 나가고, 나는 혼자 남은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수만 가지의 다름을 가진 우리는 어쩌다 '피구'라는 매개체로 살짝 스쳐 인연이 되었다. 그날 내가 피구를 하러 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뭔가 로맨틱한 대답을 기대하는 나를 그가 무신경하게 쳐다봤다. 글쎄. 그럼 또 그런대로 다른 삶을 살아갔겠지. 그렇지. 현실적인 그의 성격은 나와 다른 수만 가지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런데,라고 말하는 그의 시선은 어느새 컴퓨터 화면에 박혀 있었다. 무심하게 덩치만 큰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너랑 같이 사는 삶을 알게 되어서 참 다행이야_




*표지 사진 출처: V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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