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How can I write Minji in Korean?
민지. 삐뚤삐뚤 글씨를 정성스럽게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내야 할까. 다른 여자 이름을 쓰고 있는 것? 아니면 내가 반대한 일을 기어코 저지르고 만 것?
'민지'는 삼 년 전 그가 마련한 빨간색 혼다 바이크이다. 그 색깔이 투애니원의 공민지 머리색 같다며, 그는 단박에 자신의 애마를 '민지'라 불렀다. Spotiify에서 우연히 발견한 투애니원의 옛날 노래에 빠져있던 그가 언제 그룹 멤버의 머리색까지 찾아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름이 참 예뻐. 바이크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내 한글 이름은 예쁘다고 칭찬한 적도 없으면서. 화를 내고 싶은 포인트가 하나 더 생겼다.
그는 한글로 '민지'라고 적은 포스트잇을 사무실 한편에 붙여 놓았고, 우연히 이를 본 다른 부서의 직원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여자 친구가 한국인이야? 예쁜 이름이네.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던 그 직원은 이후로 그를 볼 때마다 유독 친밀하게 대해주었다. 여자 친구의 한글 이름을 붙여놓고 연습할 만큼 로맨틱한 남자라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말이에요, 제 이름은 민지가 아닙니다.
처음 그가 바이크를 사겠다고 선포했을 때 나는 길길이 뛰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아냐, 사고 나면 그대로 목숨과 연결된다, 사기만 해봐라 그날로 우리는 남남이다, 뭐 이런 식의 날뜀이었던 것 같다. 전후 맥락 없이 (마치 엄마가 아들에게 타이르듯) 무조건 안돼,라고만 말하던 내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내가 얼마나 안전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너도 알지 않냐, 별도로 바이크 수업도 듣겠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타지 않겠다, 교통 체증에도 구애받지 않고 차보다 경제적이니 얼마나 좋으냐, 등등. 그리고 마지막엔 내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인데 존중해 줄 수 없어? 나는 너의 허락이 아니라 이해가 필요한 거야.
그는 민지를 구입하자마자 바이커를 위한 운전 수업에 참여했다. 안전하게 바이크를 타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 수업에서 그가 얻은 건 '안전 운전 스킬'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스킬'과 함께 취미가 같은 '친구들'이 덤으로 생겼다. 그것도 아주 많이.
드르륵, 드르륵. 날씨 좋은 주말,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운전 학원 동문 친구들임이 분명했다. 다음 주부터 계속 비가 온대. 다 같이 라이드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은데... 가자미 눈을 하고 있는 내게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녀와. 이 좋은 주말에 부인이 아닌 바이크와 데이트를 한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장갑과 헬멧은 제대로 챙겼는지, 라이드용 바지와 재킷 속 패드는 잘 장착되어 있는지,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우스웠다. 민지, 요 얄미운 것.
비가 온다던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았다. 신이 난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밴쿠버에서 한두 시간 내외의 지역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초보 바이커는 혼자 다니는 것보다 앞뒤로 다른 바이커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바이커 그룹은 보통 네다섯 명이 함께 했는데 20대부터 5,60대까지 그 연령대도 다양했다. 여기 할머니 보이지? 우리 중 가장 베테랑이야. 그는 단체 사진 속 긴 은발의 여성을 가리켰다. 은퇴하고 시간이 많아서 바이크를 자주 타신대. 젊은 할머니의 취미, 바이크. 그 생소함에서 왠지 모를 매력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경험해보지 않고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지. 그럼... 나도 한번 바이크를 타 볼까?
정말 탈 수 있겠어? 겨우 그의 뒤에 앉아서 다운타운을 나가는 정도였는데 그는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했다. 겁에 질린 내가 난리 부르스를 치면 어쩌나,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도 조금 겁이 났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큰 맘먹고 지른 바이크용 헬멧과 장갑을 환불할 순 없었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은발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민지야, 잘 부탁한다.
민지는 주택가를 한 바퀴 돌며 몸을 풀고는 서서히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자전거도 제대로 탈 줄 몰랐던 나는 코너를 돌 때마다 겁에 질린 채 그의 허리춤을 움켜쥐었다. 처음 얼마간은 긴장한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고속도로 대신 일반도로를 택했고, 나는 민지가 신호에 걸려 멈춘 순간에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햇살 좋은 날. 아직 완전한 여름이 아니었지만 이마와 등줄기에선 땀이 나고 있었다. 그때 신호등에 녹색불이 뜨고 민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벼운 바람이 일렁였다. 헬멧 속 가려운 머리를 긁어주는 느낌.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면 이렇게 살랑이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바이크 (뒷좌석) 타기에 적응했다. 몸을 움츠린 채 땅을 보면 멀미가 날 것 같은 공포를 느끼지만, 저 멀리 천천히 움직이는 건물들과 나무들을 바라보면 자유를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와 달리 온몸으로 부딪히는 바람도 좋았다. 민지와의 첫 데이트는 완벽했다. 다운타운 내에 있는 스탠리 파크 구석구석을 돌고, 뷰 포인트에서 사진도 찍고,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다음 데이트를 약속했다. 그래, 겪어보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 나는 민지를 향한 그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_ 나 민지랑 데이트 좀 하고 올게.
날씨가 좋았던 지난 주말, 그가 헬멧을 챙겨들며 말했다. 나는 예전과 달리 그와의 시간을 순순히 민지에게 양보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민지와의 이별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나도 같이 가,라고 말하기엔 그의 표정이 제법 경건해 보여 얌전히 물러서기로 했다.
민지는 초보 바이커에게 적합한 비교적 작은 사이즈이다. 육중한 몸집의 그와는 조금 안 어울리는 커플이라고나 할까. 그는 다른 바이크로 옮겨 탈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아예 민지를 팔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지, 우리도 이다음에 은퇴하면 바이크 타고 캐나다 일주를 하게 될지도. 그가 말한 '우리도'에는 '은발의 베테랑 할머니 다음 차례로'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녀가 최근 바이크를 타고 캐나다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는 사진을 온라인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도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딱히 그런 노후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 혹시 모르지. 그가 조목조목 계획을 설명하면 나는 길길이 뛰며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바이크 뒷좌석에 오를지도. 그리고 밴쿠버를 떠나 처음 보는 마을 어딘가에서부터 그 여행을 좋아하게 될지도. 그럼 그때는 민지보다 조금 큰 아이와 함께 하자.
사람의 생이 하루라면 내가 그를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반나절. 그러니까 남은 평생 우리는 이렇게 아웅다웅하며 살아가겠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시간을 거쳐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부부관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