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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Apr 22. 2019

Something cheap

'아껴야 잘 산다'는 말이 더 있어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_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준 적이 있다. 


가훈? 우리 집은 그런 게 없는데?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아빠에게 물으니 거 있잖아, 가화만사성, 하고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가.화.만.사.성. 또박또박 글자를 적고 있노라니 신문을 뒤적이던 아빠가 대답을 고쳐 말했다. 아니다, 그거로 해라. 아껴야 잘 산다. 그거 좋다. 


숙제를 위해 급조된 가훈이긴 했지만 아빠의 생활습관에 잘 맞는 말이긴 했다. 아껴서 잘 사는지는 몰라도 아끼기는 했으니까. 절약이 몸에 밴 아빠 덕에 살림이 쉽지 않았던 엄마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얹었다. 아껴야 잘 살기는 개뿔. 야, 싼 게 비지떡이다. 그거로 해라, 우리 집 가훈!



#_ 첫 데이트. 우리는 아이스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오후에 함께 마시는 커피 한잔은 저녁 식사나 영화보다 훨씬 심리적 부담이 적었다. 밝은 대낮에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소.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기도 좋고, 잘 맞지 않는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도 편한 곳이다. 다행히도 우리의 경우는 전자에 속했다. Dodgeball class에서 처음 만난 뒤 몇 번 오고 간 문자가 우리 관계의 전부였으니, 아이스커피 한잔을 마시는 시간은 서로에 대한 호감과 궁금을 드러내기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근데, 배가 좀 고프지 않아? 커피숍을 나온 우리는 가까운 공원까지 함께 걷기로 했더랬다. 한창 더위가 이어졌던 팔월. 그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 얼굴로 내게 물었다. 흠. 저녁 식사는 다음 데이트에 하고 싶은데. 어디서 무얼 먹을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찬찬히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그럼 뭘 좀 먹을까? 줏대라곤 없는 나는 늘 상대방의 제안에 휩쓸린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지금 먹고 싶은 게 없어, 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음, 글쎄. Something cheap?


Something cheap? Cheap? 진지하게 분위기 잡은 데이트를 꿈꾼 건 아니었지만, 호감 가는 남자에게서 cheap 한 걸 먹으러 가자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런 단어를 들을 것이라 상상해보지 못했다. Something cheap은 개뿔. 싼 게 비지떡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나란히 앉아 쌀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 더웠던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쨌든 그의 바람대로 쌀국수는 cheap 했다. 



#_ 경우에 따라 'something cheap'은 최악의 데이트 경험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겠다. 


세상에, 나 이런 사람이랑 만나봤잖아!라는 식의 과거형으로. 나의 경우에는 세상에, 우리 신랑 첫 데이트에 이런 말을 했잖아!라는 현재와 무관하지 않은 찝찝한 과거형 문장이 완성된다. 그렇다. 나는 첫 데이트에 something cheap을 외친 남자와 삼 년의 연애를 하고 이년 째 결혼 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는 물질주의 사상을 멀리하는 대신 소박한 삶을 지향한다. 쉽게 말하면 아끼며 사는 것은 기본이요, 아무 때고 스스럼없이 something cheap! 을 외칠 수 있는 삶이 되겠다. 여기에 조금 더 주석을 보태자면 사람 참 검소하네, 라는 칭찬과 이 쩨쩨한 인간아, 의 경계를 애매하게 넘나드는, 그런 삶을 의미한다.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에 신중한 그는 기존의 물건을 버리는 대신 다양한 방법으로 업사이클링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목 부위가 너널너덜하고 겨드랑이가 터져버린 티셔츠도 곱게 모았다가 재봉틀로 한데 묶어 퀼트 이불을 만든다. 뿌듯하게 이불을 쫘악 펼쳐놓고 각 티셔츠 조각마다 얽혀있는 추억을 곱씹는 것은 그의 몫, 산더미처럼 쌓인 넝마를 처리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가끔은 오래된 후드 집업이나 낡디 낡은 장바구니들을 모아 가방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봐도 꽤 잘 만든 것 같아. 흡족한 표정의 그가 한 마디 덧붙인다. 너를 위해 만들었어. 버려, 제발 좀 버리라고! It looks cheap! 내게 잘못이 있다면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게 잘못이라 하겠다. 만족은 그의 몫,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cool story bro!'와 'a better bag' 이라는 문구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기존의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것에서 수위를 높이면 버려진 물건 주워오기 단계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멀쩡한 것도 너무 쉽게 버린다니까. 그는 어디선가 낡은 오디오 스피커를 가져와 거실 구석에 두었다. 나는 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것일까. 제발 치워버리라는 나의 요구가 계속되던 어느 날.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던 그가 분해한 스피커를 거실 책장에 붙박았다. 그럴듯한 모양을 새긴 나무판으로 낡은 겉면까지 대체해가면서. See? It doesn't look cheap anymore!


나무판으로 가린 낡은 스피커와 안쓰는 도마를 이용해 만든 조이스틱


그런 그에게도 비싼 물건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한국의 전기 압력 밥솥이다. 연애 시절 그에게는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전기밥솥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압력밥솥은 꼭 필요해. 내가 한국 마트에서 500불짜리 밥솥을 구입했을 때 그는 컬처쇼크로 인한 심정지라도 온 듯한 모습이었다. 밥솥이 500불이나 하다니. 그는 한평생 그토록 화려한 밥솥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저녁. 한국 밥솥의 위력을 보여주리라. 나는 야심 차게 쌀을 씻고 밥솥의 버튼을 눌렀다. 얼마 뒤. 맛있는 밥이 준비되었습니다. 삐, 삐, 삑_ 밥솥이 압력을 뿜어내며 소리를 내자 화들짝 놀란 그가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It talks! It talks! 밥솥이 말을 한다, 밥솥이 말을 해! 그는 마치 램프의 요정이라도 본 듯 넋이 나가 있었고, 나는 그 틈을 타 밥을 푸고 상을 차렸다. 자, 밥 한술을 떠 보시게. 나는 가만히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뚝딱 밥 한 그릇을 비운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 밥솥 비쌀만하네. 




#_ 인테리어 가게를 구경하다 예쁜 액자를 발견했다. 


예쁘다. 우리 집 거실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저렇게 만드는 거 어렵지 않겠는데? 사지 마. 내가 만들어 줄게.

그래? 그럼 한 번 만들어봐. 거기에 우리 가훈 멋있게 적어서 걸자. 이렇게.




KEEP CALM

and

BUY ONLY

SOMETHING CHEAP_

















** 사진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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