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 부부가 되는 험난한 과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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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프러포즈는 싱거웠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보는 중이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나긋하고 침착한 그의 목소리는 마치 후식 먹을래?라는 식의 질문을 하는 듯했다. 눈 앞에 실버와 로즈골드가 섞여 작은 매듭을 지은 실반지가 보였다. 응. 너랑 결혼할래.
약혼반지의 정석은 다이아몬드다. 누군가 어떤 약혼반지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요지는 스타일이지 다이아몬드의 유무가 아니다. 이곳에선 흔히 말하길 남자 월급의 세배 정도가 반지를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모두가 그 흔한 말을 따른다면 약혼반지는 남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 터였다.
그는 일반적인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약혼반지에 다이아몬드가 있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앞서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결혼을 원치 않던 남자와 지극히 일반적인 제도 속의 삶을 살아온 여자. Will you marry me. 그 한 마디가 나오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 삶의 궤도에 맞춰야 했는지 잘 알기에, 그 날 저녁의 싱거운 프러포즈는 내게 무엇보다 특별한 순간이었다. 약혼반지에 다이아몬드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색깔이 합쳐져 매듭을 지은 단순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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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캐네디언들은 약혼에서 결혼까지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준비하는 것을 좋아한다. 웨딩플래너를 고용하는 커플도 있지만 소소로운 것까지 신랑 신부가 직접 준비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약혼 후 5개월 뒤 결혼식을 올렸으니 부부가 되기까지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8월이 좋겠다. 날씨도 제격이고 마침 한국에서 부모님도 오시니까. 우리는 우선 날짜부터 정하고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도 나도 수백 명을 초대할 만큼 화려한 인맥을 지니지 않았을뿐더러 최대한 간결한 식을 원했다. 그렇다면 스몰 웨딩. 신혼집을 구해야 하니 웨딩에 들어갈 비용은 최대한 아끼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예산은 $5,000. 덕분에 destination wedding(하객들이 휴가 겸 참석할 수 있도록 외국의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결혼식)과 같은 화려한 스몰 웨딩은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시청에서 양쪽 증인만 함께 해서 간단히 식을 올리는 건 어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캐나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marriage commissioner(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주례)와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 줄 친구들만 있으면 되니까. 문제는 양측 부모님이었다. 우리는 아무리 간단해도 가족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배에서 하는 웨딩은 어때? 비쌌다. 아무리 작은 배에 소수 정예 인원을 실어도 우리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열기구를 타고 하는 웨딩은?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열기구에 올라타 하늘에서 하는 결혼식이라니. 열기구만 예약하면 식장 대여비며 꾸밈비도 들지 않을 테고. 그런데 문제는 역시 가족들이었다. 식을 올리기도 전에 엄마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하우스 마당을 예쁘게 꾸며서 결혼하자. 요즘은 시골 풍이 유행이잖아. 우리는 하우스 주인이 아니었다. 정 원한다면 아파트 복도를 버진 로드 삼아 걷고 거실에서 식을 올리면 되긴 할 터였다. 양측 부모님은 소파에 앉고 우리는 티브이 앞에 서면 되겠지. 하긴, 원빈과 이나영이라면 이것도 그림이 될 수 있겠다. 문제는 하우스가 아니라 너는 원빈이 아니고 나는 이나영이 아니라는 것일지도.
그럼 공원을 빌려서 야외 결혼식을 하자. 그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듯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날씨 좋은 밴쿠버의 여름에 가장 인기가 좋은 타입은 역시 야외 결혼식이었다. 장소 대여비도 $400 정도로 예산에 맞아떨어졌다. 그 말인즉슨 이미 그해 여름의 웬만한 공원은 다 예약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방법이 없어, 없다고! 우리 정말 $5,000로 결혼할 수 있을까?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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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표류하던 그의 눈이 반짝였다. Bloedel Conservatory! 여기 어때? 그의 랩탑 화면에는 밴쿠버에 있는 온실에서 키우는 식물이 수십 년 만에 꽃을 피우니 보러 오라는 광고가 띄어져 있었다. 그런데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온실 속 작은 웨딩! 여기서 스탠딩 웨딩을 하자!
우리는 빛의 속도로 인터넷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온실은 웨딩이나 작은 이벤트를 위한 대여가 가능한 장소였다. 그것도 무려 $255이라는 착한 금액에 말이다. (2년이 지난 지금 대여료는 $484로 올랐다.) 장소가 협소한 까닭에 30명 이상 입장이 불가능하고 온실 영업시간 전후에만 사용 가능하다는 단점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약하지 않은 덕분에 성수기인 여름의 주말을 손쉽게 예약할 수 있었으니 우리에겐 장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가장 중요한 웨딩 장소를 결정한 이후 나는 비싸지 않으면서 비싸 보이는 웨딩드레스를 찾아 여러 가게들을 전전했다. (북미에서는 보통 결혼식 당일까지 신랑에게 웨딩드레스를 보여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가게는 웃음을 잃은 건조한 얼굴의 아주머니가 박리다매로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 세 벌 이상은 입어볼 수 없엇! 착용 후 사진은 절대 불가햇! 안경 너머로 고객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과 말투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승부수는 고객 서비스가 아니라 저렴한 가격이었으니까. 덕분에 나는 그곳에서 제법 괜찮은 웨딩드레스를 $200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는 그대로 결혼 예복 사냥에 나섰다. 결혼식뿐 아니라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을 사고 싶다던 그가 선택한 것은 린넨 소재의 흰 셔츠와 파스텔톤 하늘색 정장이었다. 가격은 $150. 모든 것을 그 가격에 해결할 수 있었다니, 나의 웨딩드레스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놀라운 쇼핑 실력이었다.
예복에 비하면 결혼반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약혼반지와 짝으로 나온 실반지를, 그는 굵고 검은 텅스텐 반지를 골랐다. 두 반지 합쳐 $350.
그렇다면 리셉션은 어디서 해야 할까?
온실 가까이에 웨딩 리셉션을 주로 하는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우리의 예산과는 한참 거리가 먼 곳이었다. 비어있는 장소를 빌려 음식을 케이터링 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비교적 저렴한 한국 레스토랑을 생각해봤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작지만 분위기가 있고 음식은 맛있되 비싸지 않으며, 이것저것 꾸미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그러니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장소를 찾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 둔 곳이 있는데 말이야... 그가 말한 곳은 퓨전 스타일의 중동 음식을 다루는 레스토랑이었다. 실크로드의 느낌을 살린 특유의 분위기와 건강한 식재료를 앞세워 두터운 고객층을 확보한 곳. 그런 레스토랑에서 작은 규모의 이벤트를 받아줄지는 의문이었다.
You are more than welcome!
한 걸음에 달려간 레스토랑에서 지배인은 의외로 우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단체 예약 손님을 받은 적은 있어도 웨딩 리셉션을 해본 적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꽤 좋은 생각인걸? 지배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음식은 맛도 훌륭했고 양도 넉넉했다. 30인분 예상 가격은 $1,000 남짓. 문제는 디저트가 생각보다 비싸다는 사실이었다. 이러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어. 앙증맞은 예산의 절반을 이미 써버린 나는 망연자실했다. 아무래도 돈을 더 써야 할 것 같다는 나의 반응에 그는 한동안 숨기고 있던 짠돌이 자아를 불쑥 꺼내보였다. 안돼. 내가 처음 생각한 예산은 $3,000이었다고. 부족할까 싶어서 $5,000로 올린 건데 그럴 순 없어.
뭐? $3,000? 최근 캐나다 평균 결혼 비용이 $30,000이라는데 우린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화려한 웨딩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아껴야 하나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차라리 옛말처럼 물 한 그릇 떠놓고 결혼하고 싶은 심정이 치솟았다. 됐어! 그럼 네가 알아서 해! 디저트를 먹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화가 나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분명히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럼 내가 알아서 결정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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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웨딩을 준비한 지 두 달 남짓. 최대한 간소한 결혼식을 올리겠다던 우리의 의지와 달리 해야 할 일들은 끝이 없어 보였다. 어떤 물건이든 '웨딩'이라는 단어만 앞에 붙으면 그 값이 비싸졌고 빠듯한 예산은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너네 그래 가지고 결혼은 할 수 있겠어? 신용카드를 꺼낼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환청이 아니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우리는 재빠르게 to do list의 목록들을 해치우고 있었지만 그만큼 사소하게 싸우는 날도 잦아졌다. 웨딩의 주요 색깔부터 피로연 음식, 손님 선물 고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한 마음으로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싫다며? 결혼은 꿈도 꿔보지 않았다며? 관심 없었다던 그놈의 '결혼'을 앞두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그가 문득 얄미워졌다.
두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요. 하나씩 양보하면 결혼 준비가 더 간단해질 거예요.
커피숍에서 우리를 마주한 marriage commissioner는 이런 조언을 남겼다. BC주 웹사이트에 올라온 리스트와 평점을 보고 연락한 그녀는 별 다섯 개를 획득한 베테랑다웠다. 결혼식에 앞서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지, 어떤 형식의 주례를 원하는지를 묻고는 우리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덧붙인 말이었다. 내가 지금 너희의 마음을 보고 있다, 와 같은 느낌의 그윽한 눈길과 함께. 그녀가 우리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입을 뗐다.
주례 비용은 80불이에요_
그녀가 떠난 뒤 우리는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복잡해진 결혼 준비 과정이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럼 우리 정말 하고 싶은 것 하나씩만 고르자. 그는 세리머니에 들러리를 세우는 것을, 나는 웨딩 전문 사진작가를 고용하는 것을 꼽았다. 그리고 나머지 욕심은 적당히 포기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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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석 달. 우리는 세레모니 촬영에 $1,250이 드는 사진작가를 추천받았고 양측 들러리들의 드레스와 셔츠도 $200 정도에서 해결했다. 동네 페스티벌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 플로리스트를 통해 $600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모든 부케와 리셉션 테이블에 놓을 장식까지 구할 수 있었다. 소량의 청첩장과 손님들에게 줄 선물은 그가 직접 만들었다. 화관과 베일, 메이크업과 웨딩 케이크 등 친구들로부터 받은 도움이 말할 수 없이 컸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총 결혼 비용은 $4,500. 예산 맞추기는 성공했지만 간단할 줄 알았던 스몰 웨딩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프러포즈를 받을 때의 감동은 사라지고 빨리 해치우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던 순간.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까지 그가 어떤 디저트를 골랐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2017년 8월 26일.
3년의 연애 기간보다 더 많이 싸웠던 5개월이 흐르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_
Main Photo by Marisa Mort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