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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un 03. 2019

온실 속 작은 결혼식

연인이 부부가 되는 험난한 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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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성인이 되고 처음 가본 결혼식은 초등학교 동창이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깔끔한 예식장을 선택했다. 전철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위치와 새로운 인테리어, 뷔페 음식 맛까지 훌륭해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식 마치면 신랑 신부가 꽃마차에 올라서 퇴장한대. 멋있지 않아? 꽃보다 예뻤던 스무 살 그녀의 달뜬 얼굴에 덩달아 나까지 흥분되었다. 그해 봄. 수줍은 신부가 된 그녀는 신랑의 손을 잡고 그토록 기대하던 꽃마차에 올랐다. 예식장의 최신식 기계가 만들어 낸 비눗방울들 사이로 마차가 지나가던 순간. 환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보다 더 뚜렷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스무 살에서 마흔 살까지. 이십 년의 시간 동안 주변의 많은 커플들이 부부가 되었다. 언니와 형부는 성당에서 두 시간에 걸친 긴 결혼식을 올렸고 대학 동창은 한복을 입은 미국인 신랑과 연지곤지를 찍었다. 고등학교 단짝은 신랑의 축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가수가 꿈이었던 친구는 자축의 노래를 부르며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화려한 춤을 선보였다. 누군가는 고향의 웨딩홀에서, 누군가는 낯선 나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누군가는 수많은 하객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였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조용히 반지를 나누었다.  


결혼식은 그 주인공의 모습을 꼭 닮아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마치 자신의 삶을 짧은 행위예술로 그려내는 것만 같다. 그래서 세상에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결혼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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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차피 곧 일어나 슬슬 머리도 만지고 화장도 해야 할 터였다. 어둠이 컴컴하게 가라앉은 방에서는 그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고 있었다. 준비할 것이 많지 않은 그는 딱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평소처럼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회사 대신 온실로 나서기만 하면 되니까. 아차. 집 앞 꽃집에서 부케를 챙겨 오는 건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이따 봅시다, 허즈번드. 허즈번드. 연습 삼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어색함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새벽 다섯 시. 머리와 화장을 시작했다. 혼자서 적당히 꾸며보려 했는데 단골 미용실 언니와 화장 기술이 좋은 친구가 도움을 주었다. 어머님, 따님 예쁘죠. 미용실 언니의 인사성 멘트에 엄마는 예, 예, 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했다. 우리 집 딸들은 나 닮아서 인물이 없어,라고 말하는 게 우리 엄마인데 말이다. 우리 딸 행복하게 살기를. 그 마음 하나로 낯선 타지까지 날아와 생전 처음 보는 요상한 결혼식을 하게 생겼으니, 엄마도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을까. 한복을 단아하게 입고 어색하게 앉아있는 엄마를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종이조각처럼 구겨졌다. 그나저나 아빠는 늦지 않고 잘 일어나시려나. 머리에 새집은 없어야 할 텐데.

 

아침 여덟 시. 온실이 자리한 공원에 도착했다. 그와 들러리들은 세리머니에 앞서 한창 예행연습을 진행 중이었다. 신부 대기실이랄 곳이 딱히 없기에 나는 몰래 온실 구석에 숨어있기로 했다. 결혼을 앞둔 신부보다 아름다운 밴쿠버의 여름. 온실 돔 위로는 팔월의 햇살이, 아래로는 무성한 식물들이 꽃과 함께 어우러져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새들의 소리. 아무 장식도 더할 필요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예식장이었다.



아침 아홉 시. 사회자의 지시도 음악도 없이 세리머니가 시작됐다. 새 둥지 아래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운데 flower girl을 맡은 친구의 딸이 작은 부케를 손에 쥐고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박자박.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우리가 보이지 않을 것임에도 아이는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러운 걸음을 떼었다. 새들의 지저귐을 신호 삼아 나도 곧 뒤를 따랐다. 한 굽이 지나 보이는 작은 다리 위로 양복을 차려입은 아빠가 보였다. 내가 이제라도 결혼해서 좋아? 우리는 팔짱을 끼고 발걸음을 맞췄다. 어쩐지 한참 작아진 아빠. 그럼. 나는 네가 평생 골드미스도 아니고 스뎅 미스로 늙어갈까 봐 걱정했지.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은 예식에 앞서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우리 없어도 혼자가 아니니까. 타지에도 가족이 있으니 뭔 걱정이 있어. 순간 눈 앞의 녹색빛이 물에 잠긴 듯 일렁거렸다. 잘 살게요. 행복하게. 우리는 나란히 오솔길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저 앞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고 그 가운데 말간 얼굴의 그가 서 있었다.



하얀 린넨 셔츠와 푸른색 나비넥타이. 과감하게 수염을 밀어버린 그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단정한 차림이었다. 커다란 덩치, 선한 눈매 그리고 도톰해 보이는 뱃살. 그는 우리가 처음 만난 날과 변함없었다. 더 줄어든 머리숱 말고는. 그에게 나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람일까. 내 손을 잡고 마주한 그가 환하게 웃었다. 마치 예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Wedding commissioner가 예정된 주례사를 건넸다. 그녀와의 사전 만남에서 우리가 원한 것은 딱 두 가지. 최대한 간결할 것, 종교와 관련된 내용은 배제할 것. 각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양쪽 가족들과 무신론자인 그를 아우르기 위한 결정이었다. 베테랑 그녀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멘트를 끝으로 우리는 결혼 서약을 주고받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할게요. 간단한 서약이었지만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한 무게라고 생각했다. 반원을 그리며 서있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witness인 양쪽 들러리 친구들과 우리가 사인을 함으로써 세리머니는 끝을 맺었다. 폭죽도 꽃가루도 없었다. 여전히 새들이 울었고 녹색빛이 햇살에 빛날 뿐이었다. 3년의 연애, 5개월의 험난한 준비과정. 그리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_


오후 한 시. 런치 리셉션이 열렸다. 아빠의 편지 읽기, 들러리들 그리고 신랑의 간단한 연설이 있었지만 본래 목적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것에 있었다. 이른 시각부터 우리 부부의 탄생을 지켜봐 준 사람들. 신부화장을 해주고, 베일과 화관을 만들어주고, 웨딩케이크를 구워주고, 함께 웃어주고 박수를 쳐 준 고마운 이들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낯선 땅. 여름옷만 잔뜩 들었던 가방 하나가 내 재산의 전부였는데. 어느새 낯선 땅은 터전이 되고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리고 이제 내 옆에는 신랑이 있다.


I love you, my new wife and ex-girlfriend. 싱긋 웃는 그의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I love you, my new husband and ex-boyfried. 웃음에 실패한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_ 모두에게 주고 싶은 작은 선물이 하나 있어요. 여기 줄 서서 저를 따라오세요.


리셉션이 끝날 무렵 그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거리로 나섰다. 둘셋씩 짝을 이룬 행렬이 그의 지휘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넌 뒤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멈췄다. Congratulations! 우리의 모습을 본 점원들이 아이스크림 샌드위치가 정렬된 쟁반을 들고 나왔다. 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디저트! 하객들은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게 앞 공터를 채우며 다시 한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유, 길거리에서 이렇게 먹어도 되나 몰라,라고 말하던 엄마도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었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우리가 한여름의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것. 그것은 화려해서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함께하기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지금은 핫플레이스가 되어버린 그날의 아이스크림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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