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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Aug 12. 2019

게으른 여행자의 발리

2년 만에 쓰는 신혼여행기 1.

#_


여름은 딱 질색이다.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살을 에는 혹한을 택하리라. 옷은 입고 입고 또 입을 수 있지만 벗고 벗고 또 벗을 순 없으니까. 추위와 달리 더위는 내가 상대하기 싫은 부수적인 것들도 딸려있다. 이를테면 유독 내 피만 좋아하는 모기라던가 자기혐오를 일으키는 찝찝한 땀,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며 새까매지는 나의 피부 같은 것. 그래서 여름의 나는 엄청나게 게으르다. 게으름은 월동 준비에 들어가는 곰처럼 월서를 준비하는 나의 전략인 셈이다. 여름휴가가 무슨 소리. 집 밖은 위험해!


발리로 신혼여행이라니! 정말 기대되지 않아? Aren't you excited??


내 마음을 모르는 신랑만 신이 났다. 한국에 살 때도 가까운 동남아 여행 한번 나서지 않았던 나다. 모두가 우울해진다는 밴쿠버의 우기만을 애타게 기다려 온 나란 말이다. 정말 기대되지 않느냐고? 타다 남은 재처럼 까맣고 모기에 뜯겨 울긋불긋해진 이 몸이 반짝이는 땀으로 완벽하게 코팅되는 순간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러게. 정말 기대되네. Can't wait_


내가 꿈꾸던 신혼여행지는 발리가 아니었다. 아니, 더운 나라는 모조리 아웃이었다. 하지만 친구 커플이 발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을 때, 신랑이 그들의 들러리가 되어주기로 했을 때, 우리의 통장 잔고가 연이은 장기 여행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모든 것은 한 큐에 끝나야 했다. 삼 주일 간의 발리 여행. 더위보다 매력적인 무언가를 꿈꾸는 수밖에.




택시? 택시? 택시, 태액시??


새벽 한 시, 덴파사르 공항. 우리는 빗발치는 택시기사들의 호객 행위 한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놓였다. 그중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한 아저씨의 선한 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사두아, 플리즈. 


아저씨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흥정을 했어야 했나. 순간 뒤늦은 망설임이 일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밤은 깊었고 습한 더위와 모기들은 이미 우리를 향해 전투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가격 흥정은 기본이라던 인도네시안 친구의 조언을 무시한 채 우리는 가뿐히 택시기사에게 짐을 양도했다. 그리고 무사히 호텔에 안착. 우리가 지불한 금액이 평균 택시 요금의 두배였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발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여유로운 휴식을 원하는 이들이 즐겨 찾기도 하고, 노매드 라이프를 꿈꾸는 이들과 힙스터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한다. 천혜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물론이요, 서핑이나 요가, 음식을 비롯한 문화적인 요소들도 꽤나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야 할 발리의 매력은?


우리 여기에 가볼까? 더워.

우리 이거 한번 해볼까? 더워.

우리... 더워.


후텁지근한 날씨에 나의 괴팍한 성질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래도 그렇지. 신혼여행인데 나도 참 못됐네,라고 여길 찰나.


그래, 너무 덥긴 하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누워 있자. 


그가 싱긋 웃으며 볼록 나온 배 위로 손을 얹었다. 호텔 조식이 맛있다며 신나게 먹은 결과였다. 먹고 눕고, 먹고 눕고. 하루 종일 배 깔고 드러누워도 용서되는 시간. 이곳에서는 반드시 들러야 할 여행 명소를 챙기지 않아도, 그럴듯한 레저 액티비티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첫 일주일을 보낸 대규모 리조트 지역 누사두아는 우리에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더울 땐 사진 찍는 것도 귀찮다.




신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내가 찾은 발리의 첫 번째 매력, '게으른 휴식'.

누사두아에서 맞는 첫째 날 아침. 조식 이후 다시 나란히 침대에 누운 우리는 하릴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의 피로에 밤낮이 바뀐 시차까지 더해지니 몸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말이야... 응?

게으름에도 철칙이 필요해. 응?

우리의 게으름에 후회가 없도록 함께 철칙을 만들자. 응?


나의 뜬금없는 철칙 타령에 신랑은 연신 눈을 껌뻑였다. Huh? 그러니까 말이야, 게으름은 아무 때나 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기왕 게을러지기로 작정했으니 최대한 열심히 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잔 말이야. Got it! 그가 힘차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야_




게으른 휴식을 위한 철칙 하나, 최대한 여러 곳에 드러누워라.


이것은 분명 함정이다. 여러 곳에 드러눕기 위해서는 '여러 곳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우리는 누사두아 내에서도 이틀에 한 번씩 리조트를 옮겨 묵었는데 매번 짐을 쌌다 풀었다 하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지친 내가 객실 내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잠시 누워 있노라면 신랑은 득달같이 달려와 외쳤다.


자, 나가자! 침대 말고도 누울 곳은 많다고! Let's go!


아이처럼 신이 난 그는 나를 앞장 세운 채 리조트 내의 수영장 주변이며 해변가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흐물흐물 고무 인간이 되어가는 부인이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파라솔 아래 놓인 선배드가 보일 때마다 하찮은 몸뚱아리를 뉘어 보았다. 뭐, 나쁘지 않긴 한데... 사실 그늘 아래서 바라보는 햇살 가득한 풍경은 제법 훌륭했다. 하지만 새삼 감탄사를 연발하기엔 너무 많이 투덜댄 후였다.


우리 저기 시원한 곳에도 한 번 누워보는 건 어때?


그가 말한 '저기'는 해변 안쪽에 놓인 마사지 베드였다. 우리가 해변가에 들어설 때부터 적극적인 호객 행위를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마사지? 마사지?라고 외치는 소리는 공항에서 들었던 택시? 택시?라는 소리와 묘하게 겹쳤다. 노 땡큐. 안 그래도 호시탐탐 노리던 해변 앞 넓은 그늘 자리가 난 참이었다. 나는 이곳에 드러눕겠어. 나의 단호한 결정에 잠시 망설이던 그는 혼자 마사지 베드로 향했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늘이 저 멀리 도망간 줄도 모른 채 깜빡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겨울에도 구릿빛인 나의 피부는 어느새 콩자반이 되어 있었다. 악, 따갑다 따가워.


악, 따갑다 따가워.


마사지를 마치고 돌아온 신랑의 등이 벌갰다. 저 아주머니 손이 완전 사포 같아! 그렇게 거친 손으로 받는 마사지는 처음이야!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너무 무례한 일이 될까 봐 끙끙 참았다는 그의 등짝은 내가 봐도 처참했다.


자, 이제 됐으니까 그냥 여기 드러누워.


어차피 콩자반인 거. 마음을 비우고 햇살 아래 대자로 뻗자 신랑도 옆자리에 누웠다. 까맣게 익어가는 내 옆으로 빨갛게 익어가는 그가 보였다. 그래. 나는 콩자반, 너는 스팸.

저기 팔각정에도 드러누워 봤다.




게으른 휴식을 위한 철칙 둘, 먹고 마시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


게으른 우리의 아침을 깨우는 힘은 식탐이었다. 리조트에서 제공되는 조식은 인도네시안 음식부터 서양식까지 그 종류가 무궁무진했다. 토스트에 에그 스크램블 따위는 의미 없다! 내가 탄수화물 중독자다운 자세로 온갖 면과 밥 종류를 섭렵하는 동안 신랑은 빵과 고기로 접시를 가득 채웠다. 과일 주스는 또 왜 그렇게 맛있는 건데.


내가 많이 먹어도 부끄럽지 않은 거지? 그렇다고 말해줘.

응. 나 만큼 먹을 줄 아는 부인이 자랑스러워.


그의 든든한 한 마디에 힘 입어 죽 한 사발 뜨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도 미고랭 한 접시 더 부탁해_


세상이 이렇게 쉽게만 살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이 촤라락 펼쳐져 있고 신선한 과일 주스로 머리를 깨울 수 있다면. 점심으로 뭘 먹을까, 저녁으로 뭘 먹을까 결정하는 것이 유일한 고민거리일 수 있다면. 입맛에 맞지 않는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붐비는 트레인에 내 몸을 실어야 하는 현실의 아침을 떠올리니 갑자기 갈증이 일었다.


신랑, 곧 해피아워야. 우리 칵테일 마실까?


선배드에 누워 있던 그의 손에는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코코넛 주스가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방금 수박주스를 끝낸 참이었다. 아, 이렇게 천진하게 먹고 마셔도 되는 것일까. 약간의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 나는 맥주 마실래_


오늘 저녁에 시푸드 뷔페가 있대. 우리 그거 먹자.


역시. 벌써 저녁 메뉴까지 체크한 그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래, 게으른 여행에 식도락이 빠질 순 없지. 며칠 사이에 제법 살이 오른 그의 배가 귀엽게 느껴졌다.

 

사실 먹기만 하느라 찍은 사진이 없다.




게으른 휴식을 위한 철칙 셋,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즐겨라.

 

누사두아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이라 칭할 만한 게 있다면 수영장이나 해변에서 개헤엄을 친다던가 리조트 내에서 바디 마사지를 받는 정도랄까. 신혼여행을 와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나 싶은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밴쿠버에서 챙겨 온 소설책 두 권을 끝냈고 신랑은 드로잉북의 절반을 채웠다.


이 그림 어때? 마음에 들어?


한동안 조용하던 신랑이 내 눈 앞에 드로잉북을 펼쳐 보였다. 채 마르지 않은 잉크가 햇빛에 반짝였다.


이 못생긴 여자가 나는 아니지?


부인을 못생기게 그리는 것과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그리는 것 중 무엇이 나은 걸까.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나를 보고 그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완벽하게 게으른 휴식의 시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함께 했다.


그림 속 나는 누워있지 않으므로 내가 아니다.




#_


누사두아는 어땠어? Did you guys have fun?


발리 여행 7일 차. 누사두아를 떠나 우붓에 도착하자 곧 있을 결혼식에 참석할 친구들이 우리를 반겼다. 적당히 그을린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니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발리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쿠타에서 서핑만 했잖아. 짱구는 힙한 장소가 어찌나 많은지. 나는 내일 새벽에 일출 트레킹을 갈 거야_ 정신없이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던 이들의 시선이 갑자기 우리를 향했다.


너희는 뭐했어?


나는 한껏 볼록해진 그의 배를 쳐다봤다. 우리가 뭘 했냐면... 불현듯 들러리 예복이 그에게 맞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너무 게을렀나. 죄책감이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푹 쉬었지. 정말 좋았어!


신랑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서핑을 하고 온 이들, 핫스폿을 돌아본 이들, 일출 트레킹을 가는 이들의 웃음과 똑같은 무언가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 그는 나의 게으른 여행을 진심으로 함께 즐겨주었구나. 특별하지 않은 순간도 함께하면 특별해진다는 식상한 문구가 머릿속에 마구 피어올랐다.


응, It was amazing!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가야지.


우리 우붓은 스쿠터 빌려서 여행하자.


응? 조금 무서운데. 택시 타면 안 될까. 그러고 보니 참 덥다, 더워. 이 놈의 모기들은 왜 나한테만 달려드는 건데. 아, 얼른 씻고 드러눕고 싶다. 하지만,


그래, 신랑 하고 싶은 대로 해_


또 다른 발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과 하나가 되리라는 예감.




** Cover Photo by David Rodrig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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