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yKwon Aug 22. 2019

삶과 여행이 공존하는 발리

2년 만에 쓰는 신혼여행기 2.

#_


발리의 전통 욕실은 이렇게 천장이 뚫려 있어.


우붓의 새로운 숙소. 이제 곧 새신부가 될 S가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혼혈인 S는 자카르타에서 태어나 열세 살 무렵 아버지의 나라인 캐나다로 왔다. 매해 발리를 찾을 만큼 이곳에 대한 사랑이 깊은 그녀 덕분에 많은 친구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일주일 뒤. S는 발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마음에 들어! 별 보면서 샤워할 수 있겠는데!


벌써부터 신이 난 신랑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름다운 열대 식물들 사이로 나란히 마주하고 앉은 오두막에는 반쯤 야외인 욕실 겸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 입구에 놓인 테이블 하나, 구석에 있는 작은 수영장, 미고랭과 나시고랭이 조식 메뉴의 전부인 곳. 화려하진 않지만 발리만의 느낌이 곳곳에 묻어나는 오두막이 나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막다른 길에 자리했다. 작은 건물들이 낮고 길게 뻗어 있는 골목길에는 주인 없는 개들이 어슬렁거렸다. 살림집이 딸린 구멍가게에는 하릴없는 주인아저씨가 졸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발리 전통춤을 볼 수 있다는 레스토랑의 서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디자인 회사의 유리창 너머로는 회의에 열중한 청년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주변 카페와 마사지숍들을 기웃거리는 여행객들도 눈에 띄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보통의 하루를 보내는 이들과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하루를 꿈꾸는 이들이 뒤섞인 장소. 그 속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발리의 두 번째 매력, '삶과 여행의 공존'이었다.




흥정, 여행의 의미에는 정해진 값이 없다.


여자 친구와 결혼하고 싶은데 돈이 부족해요. 영어를 더 공부해서 호텔리어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는 게 목표예요. 


우리의 일일 관광을 책임진 운전기사는 갓 스물이 넘었음직한 청년이었다. 관광이 주요 산업인 이곳에서 현지인의 삶과 타지인의 여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도, 우리의 여행도, 서로가 있어야 더욱 풍요로워지는 셈이었다.


물건을 살 땐 무조건 깎아야 해요. 잊지 말아요!


번화가에서 우리를 내려주던 청년이 말했다. 엄청난 비밀을 누설하듯 진지한 표정. 나는 기사 요금을 깎기 위해 계획했던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신랑, 나는 글렀어. 가격 흥정은 당신에게 맡길게. 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그는 자신 있는 모습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600,000 루피아. 이건 진짜 나이키나 다를 바 없다고요.

누가 봐도 진짜 나이키가 아닌 신발을 두고 가게 주인이 흥정을 시작했다. No way. 나는 신랑에게 부정의 눈빛을 보냈다.


200,000 루피아에 주면 한 켤레 더 살게요.

No way. 이번엔 가게 주인이 강렬하게 부정했다.


정말 많이 깎아서 500,000 루피아. 두 켤레 합쳐서 900,000 루피아에 줄게요.

노노. 250,000 루피아.

그러면 남는 게 없어서 못 팔아요!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신랑은 들고 있던 신발을 놓고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너무 세게 나간 거 아니야? 주인이 맘 상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뒤따라 나온 주인이 외쳤다.


두 켤레에 600,000! 진짜 더는 못 깎아요!


나이키가 되고 싶은 신발 두 켤레, 빈탕 맥주가 그려진 티셔츠와 사롱까지. 신랑의 '그럼 어쩔 수 없죠' 전략은 가격을 절반 이상 떨어뜨리는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기념품을 살 때도 마찬가지. 달러로 환산하면 그리 큰돈이 아니었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깎았다. 역시 Something cheap을 좋아하는 신랑 다웠다.


우리는 쇼핑을 마치고 운전을 도와준 청년과 약속한 장소로 돌아왔다. 차를 세워 둔 채 대기 중이던 청년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늦은 오후. 예정돼 있던 여섯 시간의 관광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마음에 두었던 관광지는 이미 어느 정도 둘러본 후였다. 작은 사원 하나를 들러 숙소로 돌아가면 저녁을 먹기도 적당한 시각이었다.


흠, 배고프지 않아?

응. 우리 마지막으로 사원 한번 들렀다가 저녁 먹을까?

괜찮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신랑은 내가 아닌 청년을 향해 되물었다.


돌아가기 전에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


갑작스러운 신랑의 제안에 우리 셋은 라이스 필드가 보이는 작은 레스토랑에 앉아 함께 식사를 나눴다.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청년의 발리'와 '우리의 밴쿠버'는 테이블 위 메인 메뉴로 자리를 채웠다. 지구의 반 바퀴를 건너와 어제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서로 삶의 조각을 나눈다는 것. 여행의 인연이란 것이 참 신기했다.


쇼핑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깎더니, 결국 돈은 더 썼네?


청년과 헤어진 후 사원을 가지 못한 우리는 숙소 근처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신랑은 청년에게 저녁 식사와 함께 두 시간을 추가한 관광 비용을 지불했다. 그래도 나랑 미리 상의했으면 좋았잖아. 괜한 투정이 새어 나왔지만 사실 나는 오늘의 여행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우붓에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말, 잊은 건 아니지?


그가 내 손을 가져다 깍지를 끼었다. 그래, 사원 하나쯤 덜 가면 어때서.


발리의 물건 값이 흥정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여행의 값어치도 그 주인이 매기기 나름이란 생각을 한다. 값어치 있는 여행이란 원 없이 쇼핑을 하는 것일 수도, 최대한 많은 장소를 둘러보는 것일 수도,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건 그 여행의 주인이 결정할 일이지. 똑같은 경험도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최고가 될 수도,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의 의미에는 정해진 값이 없다. 우리가 부르는 게 그 값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시시할지 모를 우리의 여행에, 나는 오늘 최고의 값을 매기고 싶다.





스쿠터, 우리는 모두 물고기 떼와 같다.


오늘은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는 거야.


작은 스쿠터에 올라 탄 신랑이 내게 뒷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우리는 몽키 포레스트와 라이스 필드를 돌며 모든 체력을 탕진한 상태였다. 오늘은 수영장에 누워 있다 지치면 카페에서 달달한 과일 주스를 마시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목적지 없는 외출을 왜? 하지만.


그래, 길이 있으면 가는 거지. 신랑의 꿈을 펼쳐봐.


우리가 탄 스쿠터는 골목길을 지나 언덕을 내려갔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 위에서 수많은 스쿠터들이 합류했다. 야, 신난다! 라이스 필드와 나란히 놓인 길 위에서 그가 소리쳤다. 신랑,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는 거지? 복잡한 대로 위에서 내가 물었다. 야, 신난다! 낯선 길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Photo by Artem Beliaikin on Unsplash


스쿠터는 교차로의 빨간불에서 멈췄다. 길 건너 건물에서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었다. 점심이 겨우 지났을 시간인데. 일찍 학교가 끝난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러고 보니 발리는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 부모가 일하고 있는 가게 근처에서 서성이는 아이들. 숙소 앞 구멍가게에서도 사내아이가 아빠를 대신해 카운터를 지키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와, 저기 좀 봐!


신랑이 네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작은 스쿠터 하나를 가리켰다. 어린 아가를 필두로 운전하는 아빠,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 그리고 엄마 순이었다. 저게 가능한 일이야? 나는 교차로 주변을 둘러봤다. 자세히 보니 무리를 지어 도로를 달릴 때는 모두 똑같아 보이던 스쿠터들도 저마다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남자, 배낭을 멘 여행객, 데이트 중인 듯한 젊은 남녀. 서너 명의 가족들이 한 스쿠터에 올라탄 모습도 제법 보였다.

 

우리는 저 편으로 갈 거야.


녹색불이 뜨자 무리를 이룬 스쿠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앞의 다양한 군상들이 사라지고 우리는 도로를 가르는 거대한 물고기의 한 점이 되었다. 거리로 쏟아지던 교복 입은 아이들과 길 위에서 한 몸이 된 스쿠터들. 그 모든 것이 꼭 물고기 떼인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발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물고기 인지도 모르겠다. 이곳 삶의 조각들과 우리 여행의 조각들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 낸 거대한 물고기.


비가 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잠시 내리다 말겠지 생각한 빗줄기가 거세지자 당장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미고랭과 나시고랭을 나란히 시켰다. 치킨 사태도 추가하고 워터멜론 주스도 주문했다.


여기 음식 참 맛있다.

그래? 사실 오늘의 깜짝 목적지는 이 가게였어.


신랑은 싱거운 농담을 던지고 사태를 집어물었다. 이 소소한 시간들이 모여 발리의 추억이 되겠지. 나는 달달한 주스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적절한 타이밍에 비가 멈췄다. 우리는 다시 작은 스쿠터에 올라 거대한 물고기의 한 점이 되었다.






#_


뭐? 그 신발을 600,000 루피아 씩이나 불렀다고?

그래도 절반이나 깎아서 샀단 말이야.


신랑의 모습을 본 S는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기분 좋게 신고 나갔던 새 신발이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말 그대로 두 동강이 난 것이다. 나이키가 되고 싶었던 신발은 새 것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물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밑창을 두고 깨금발로 숙소에 돌아온 그의 몰골도 마찬가지였다.


짱구에 가서 비치 슬리퍼 하나 사줄게. 내 결혼식 들러리에게 그 정도쯤이야.


내일은 총각 파티를 떠난 S의 남자 친구가 발리로 돌아오는 날이다. 그녀의 웃음이 멈추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발리에서 남은 마지막 일주일. 우리는 이제 우붓을 떠나 짱구로 향한다. S는 얼마나 아름다운 신부가 될까. 


오두막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었다. 오늘은 별 보면서 샤워할 수 있겠다.






** Cover Photo by David Rodrigo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게으른 여행자의 발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