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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Sep 02. 2019

사랑에 빠진 자의 발리

2년 만에 쓰는 신혼여행기 3.


#_


바다의 앞자락과 마주한 일곱 채의 작은 빌라. S와 P를 필두로 사랑에 빠진 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어느 시청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린 커플, 이틀간 인도 식으로 성대한 잔치를 벌인 커플, 셰프 신랑의 레스토랑에서 파티시에 신부가 구운 웨딩 케이크를 놓고 결혼한 커플, 함께 중국어를 배우다 혼인 신고까지 해버린 커플, 이 년간의 세계 여행 중 그 종착지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 커플, 그리고 온실 속 작은 결혼식을 마친 우리 두 사람까지.


사랑에 빠진 자들은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모여 앉은 이 바다 앞 빌라에서도 내일이면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할 것이다. 새신부 S와 새신랑 P. 우리 모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곳 발리에 왔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커튼을 여니 사방에서 바다가 몰려왔다. 이렇게 호사로운 풍경의 아침이라니. 수영장과 바다 사이로 예식에 쓰일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인 모습도 보였다. 오늘 S는 저 사이에 놓인 버진로드를 걷는 행복한 신부가 되겠지.


She was out of my league.

내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계속 데이트 신청을 했지. 이거 하러 가자, 저거 하러 가자 하고. 같이 스포츠 경기를 보러 다니면서 친해지고, 함께 축구를 하면서 더 가까워지고. 그게 벌써 칠 년 전 이야기네.


지난밤. 들러리 커플들에게 둘러싸인 P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첫 만남을 회상하는 달뜬 얼굴에선 S를 향한 사랑이 담뿍 느껴졌다. 칠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변함없이 축구를 하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한다.


How do I look?


들러리 예복으로 갈아입은 신랑이 물었다. 발리에서 열심히 먹은 흔적이 두툼한 뱃살 아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신부만큼 예쁘네. Perfect!


'한 번 하고 지나갈 것, 큰돈 쓰고 싶지 않다'라는 게 결혼식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었다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아낌없이 쓰고 싶다'라는 게 S와 P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들이 일 년의 시간 동안 꼼꼼하게 준비한 결혼식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이 더욱 기대되었다. 하물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될 때부터 지켜봤던 신랑은 오죽할까.


결혼하기 딱 좋은 날씨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 예보에 어제는 날씨를 다스리는 신에게 기청제를 올렸더랬다. 그래서일까. 먹구름이 드리웠던 지난밤의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눈부시게 밝은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게. 꼭 우리 결혼하던 날 같아.


우리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는 가운데 멋있게 차려입은 새신랑 P가 보였다.




발리에서 탄생한 부부


가까이는 자카르타에서 멀게는 스위스까지. 결혼식 하객들은 세계 곳곳에서 날아왔다. 이 글로벌한 커플에게 발리만큼 완벽한 웨딩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눈부신 햇살과 푸른 바다로 꾸며진 예식장. 빌라에 함께 머물던 커플들 외에도 오십 여 명 남짓의 하객들이 모여 자리를 잡고 드디어 신랑 측 들러리들과 P가 모습을 드러냈다. 쾌활한 얼굴과 힘찬 발걸음. 오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주인공이 된 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바다를 등지고 섰다. 이어서 꽃을 든 신부 들러리들의 입장. S의 '남자' 들러리들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걸음을 떼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질 때쯤 꽃길의 저쪽 끝에서 S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오던 그녀는 수줍음보단 당당함이 잘 어울리는 신부였다. 예쁘다.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 멋있게 예쁜 S.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P.


새신랑은 울고 있었다. 방금까지 남자 들러리들을 보며 웃고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펑펑, 아주 작정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 내리지 않은 비는 P의 눈에서 몽땅 흐르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바다 앞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S와 눈물이 끊이지 않는 P. 발리를 생각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를 장면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그럼 이제 여러분 앞에서 S Beaudoin과 P Beaudoin이 부부가 됨을 선포합니다.


Commissioner의 말을 끝으로 신부는 신랑에게 박력 있는 키스를 퍼부었다. Beaudoin. 새신랑 P가 자신의 성을 버리고 부인인 S의 성을 따르기로 한 것은 엄마가 가족의 전부인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S가 마지막 Beaudoin이니까 지켜주고 싶어. 우리 집에는 내가 아니어도 Chung을 지킬 사람들이 많거든.


Mr. and Mrs. Beaudoin.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고유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Photo by Jon-Mark / Kerrie




Pool Party


웨딩 세리머니가 끝난 뒤. 저녁에 있을 리셉션까지의 막간을 이용해 Pool party가 열렸다. 하객들은 준비해 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기도,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도란도란 수다를 떨기도 했다. 수영장에는 S와 P의 어머니들이 함께 헤엄치는 모습도 보였다. 사돈끼리 결혼식 당일에 물놀이라니. 내가 이런 웨딩 파티를 엄마에게 제안했으면 어땠을까. 어머, 남사스럽게 결혼식날 수영복을 어떻게 입니. 나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곱게 차려입은 한복 위로 잔뜩 긴장한 어깨선이 도드라졌던 우리 엄마도, 수영복을 입은 채 하객들과 물장구를 치고 있던 S와 P의 어머니들도, 방식은 달라도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꼭 닮았을 것이다.


Jump! Jump! Jump!


결혼식 사진을 찍고 돌아온 커플을 본 하객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S가 주저 없이 수영장 끝자락에 몸을 담그자 P와 들러리들이 이에 응답하듯 준비자세를 갖췄다. One, two, three, jump! 예복을 입은 이들이 풍덩 물에 뛰어들자 수영장에 엄청난 파동이 일었다. 마치 신나는 축제와 같은 결혼식. 오늘의 주인공들까지 합세한 pool party는 어둑한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Photo by Jon-Mark




멈추지 않는 축제


해가 저물고 빌라에 어둠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긴 천을 허리에 두르는 발리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는 동안 너른 정원에는 리셉션을 위한 테이블이 차려졌다. 하늘의 별과 같은 불빛들이 반짝이고 한 켠에는 갓 부부가 된 이들의 사진과 영상을 담은 스크린도 놓였다. 영화 같은 이 순간을 만들기 위해 S와 P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그들이 결혼식 준비를 위해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들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다시 결혼한다면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어?


신랑이 내게 물었다. 글쎄? 우리도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데스티네이션 웨딩을 할까? 숲 속에서 이박 삼일 정도 캠핑하는 웨딩은 어떨까? 핼러윈처럼 코스튬을 입고 하는 웨딩이라면? 하지만.


우리가 다시 결혼하다면, 그땐 꼭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올리는 결혼식을 하자. 우리 단둘이서.


그러면 이것저것 힘들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열기구만 대여한다면 상대적으로 비용도 저렴하겠지? 쑥스러움 많은 내가 하객들 앞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분명 게으른 나와 짠돌이 그를 닮은 완벽한 웨딩이 될 것이다. 오늘의 결혼식이 아름다운 것 역시 주인공인 S와 P의 모습을 꼭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리셉션은 마치 멈추지 않는 축제와도 같았다. 발리의 전통춤과 악기 연주를 시작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히고 음식을 나누며 오늘 탄생한 부부의 행복을 빌었다. 친구와 가족들의 축사, 신부에게 바치는 신랑의 노래 사이로 누군가는 웃음을, 누군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모두가 즐거운 축제였지만 그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모양이었다.


이렇게 쾌활한 결혼식은 처음 봐. 정말 S와 잘 어울려.


리셉션은 화려한 불쇼로 끝이 났지만 그 열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DJ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사람들은 춤을 추며 다시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화려한 조명과 달빛이 어우러진 축제의 현장. S와 P는 그 누구보다 신나고 행복해 보였다.


늘 밝고 명랑한 S이지만 오늘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봐. 이렇게 특별한 날을 함께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로 춤을 추는 사람들의 얼굴이 반짝였다. 사랑에 빠진 자의 발리. 그 행복의 기운이 달빛을 타고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Photo by Kerrie / Jon-Mark






#_


PR Card(영주권 카드)를 소지하지 않으면 캐나다행 티켓을 발권할 수 없어요.


밤 열두 시 덴파사르 공항. 삼주일 간의 발리 일정을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가기 위한 수속을 밟는 중이었다. PR Card를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여유롭게 공항에 들어선 내게 항공사 직원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무비자 관광이 가능한 한국 여권을 지녔음에도 PR Card 없는 영주권자는 캐나다 입국이 금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당황한 내게 직원은 캐나다 비자 사무실에서 travel document를 발급받으면 캐나다행 비행기 탑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비자 사무실은 자카르타에 있어요. 서류 발급은 보통 한 달쯤 걸릴 거예요.


신랑의 얼굴은 노랗게 뜨고 내 눈 앞의 풍경은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자카르타에서 한 달이라니. 게다가 신랑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이틀 뒤면 출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혼자서 낯선 자카르타에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찔함에 빛의 속도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신랑, 개인 차량을 이용하면 PR Card 없이 미국에서 캐나다로 입국이 가능하대!

그럼 자카르타로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응. 난 괜찮으니 먼저 비행기 타고 밴쿠버에 가 있어. 내가 미국에 도착하면 신랑이 운전해서 나를 데리러 와.

정말 괜찮겠어?


나는 걱정이 잔뜩 담긴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래,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자. 순간 내 마음에 결연한 의지가 일었다. 그 의지로 소지품을 잘 챙겼더라면 좋았으련만. 신혼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그렇게 발리의 공항에서 헤어졌다.


그가 밴쿠버로 날아가는 사이. 나는 발리에서 홍콩,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시애틀에 도착하는 가장 저렴한 비행 노선을 택했다. 발리에서의 꿈같았던 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 삼일의 시간. 시애틀 공항에 내려 신랑을 기다리던 나는 신혼여행이 아닌 무전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처참한 몰골이었다.


Honey!


구석진 곳에서 노숙인처럼 졸고 있던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랑이다! 반가움에 눈을 뜨기도 전에 그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집에 가자.


삼일 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 참 좋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신혼여행의 마지막을 망치고 그를 걱정하게 만든 죄인의 마음. 몸고생, 마음고생, 개고생을 겪으면서 위축되었던 마음이 그를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엉엉, 그래 집에 가자. 꾀죄죄한 얼굴에 눈물 콧물까지 번진 나를 그가 다시 한번 꽉 안아주었다. 발리에서 시작해 시애틀에서 끝을 맺은 우리의 신혼여행.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밤하늘에도 발리에서 보았던 낯설지 않은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 Cover Photo by David Rodrig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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