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과 같지 않은 너의 입맛
#_ 서막
그와 막 연애를 시작할 무렵, 서로의 음식에 대한 기호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손에 꼽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모든지 먹을 수 있는 식성이, 그에게는 특별히 까다롭지 않은 (저렴한) 입맛이 내장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서로를 알아가고 맞춰가려던 연애 초기 우리의 노력이 음식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덮어주었다. 그가 고른 데이트 코스에는 코리안 레스토랑이, 내가 고른 데이트 코스에는 로컬 레스토랑이 끼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보다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 그것은 '음식 전쟁'이 시작되기 전 우리 커플의 모습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코리안 레스토랑에는 다양한 음식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런치메뉴가 있었다. 잡채, 해물파전 그리고 갈비는 그의 입맛에 쏙 맞는 듯했다. 그는 반찬으로 나오는 감자조림은 물론 김치도 야무지게 먹었다. 그의 집에 초대받았던 날에는 직접 순두부찌개를 끓여주기도 했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꽤 싱거웠지만 그가 보여준 노력에 감동받은 내겐 최고의 음식이었다. 함께 수박 김치를 만든 것 역시 그의 제안이었다. 수박의 푸른 속살을 먹거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어느새 그의 옆에서 열심히 수박 껍질을 깎고 있었다. 그 날,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뒤적이며 어설프게 고춧가루의 양을 확인하던 그의 뒷모습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피자를 먹자고 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지는 사람이니까. 어쩌다 느끼한 음식만 연거푸 먹는 날에는 집에 돌아와 혼자 흰쌀밥에 얹은 김치를 먹으면 그만이었다. 조금 난이도가 있는 선택을 하자면 향신료가 강한 인도 음식이나 콩이 잔뜩 들어간 베지테리언 음식 정도랄까(나는 고기로 힘을 내는 사람이므로). 우리는 종종 함께 장을 봐서 피자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올리브를 그를 위해 팍팍 넣어가면서. 입맛은 달라도 우리는 행복했다.
#_ 라운드 1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국밥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는 날이면 늘 마지막 코스로 들리던 음식점에서 순대국밥을 먹곤 했다. 지루했던 장보기를 끝내고 따뜻한 국물과 함께 찾아왔던 노곤함도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오늘. 뭐랄까, 순대국밥은 나에게 일종의 comfort food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comfort food는 우리 부부의 음식 전쟁을 일으킨 발단이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한인타운에서 순대국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날, 그는 평소와 다르게 나를 포옹으로 반기는 대신 어색하게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그가 어느샌가 옆방으로 옮겨 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내가 잠이 들면 조용히 일어나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라는 변명은 내가 들어도 참 궁색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참다못한 내가 대체 왜 그러냐고 짜증을 내자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해. 네가 먹은 음식 냄새가 너무 강해서 옆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_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내게서 순대국밥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음식을 먹고 소화가 된 뒤, 온몸의 땀구멍에서 발산되는 희미한 냄새가 밤이 되면 유독 그의 코를 자극한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은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 화내지 말자. 냄새가 싫은 건 그의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마음속으로 평온한 바다를 떠올리며 이해심을 키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채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 외출을 하기 위해 함께 차에 오른 순간, 그가 조용히 창문을 내린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강한 향신료를 떠올리며 그를 이해하려던 마음이 사라지고 용암처럼 분노를 폭발시키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냄새가 일주일을 넘게 간다고 그래!! 내가 무슨 스컹크도 아니고!!!
나는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들어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는 연애 때와 달리 김치도 자주 먹지 않았다. 고등어와 청국장은 진작에 우리 집 주방에서 퇴출되었고, 마른오징어나 쥐포는 그가 없을 때 마시는 혼술로만 즐길 수 있었다. 그래, 이것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의 취향을, 그러니까 나의 문화를 무시하는 거야! 순두부찌개를 끓여주고 함께 수박 김치를 담그던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서운한 마음은 멈출 줄 모르고 커져만 갔다. 결국 우리의 외출은 취소되었고 그는 화가 난 나를 달래느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각방 생활은 며칠 더 이어졌다.
#_ 라운드 2
'오늘 뭐 먹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언제나 '피자'이다. 피자가 아니면 다른 웨스턴 음식, 그리고 마지막 선택으로 인도나 멕시칸 음식 정도가 있겠다. 문제는 피자, 웨스턴, 인도, 멕시칸 음식이 나의 사지선다형 질문 '오늘 뭐 먹을까?'의 보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자를 또 먹어? 웨스턴은 좀 느끼한데. 인도 향신료가 너무 강해. 멕시칸은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럼 너는 뭘 먹고 싶은 거야?
음... 오늘은 스시 어때?
그래... 그럼 스시 먹으러 가자.
아니면 우리 한국 음식 먹으러 갈까?
마지막 질문에 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싫으면 그냥 스시 먹으러 가자, 하고 투덜대는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순간 나는 그의 마음속 용암이 곧 폭발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오늘은 웨스턴 음식 먹을 거야. 네가 한국 음식이 그리운 것처럼 나도 지금 웨스턴 음식이 그립다고!!
그는 나와 달리 펑펑 울진 않았지만(사실 잘 우는 남자다) 그가 느낀 서운함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아차 싶은 마음에 되돌아보니 최근 우리의 외식 코스는 전적으로 내 위주였다. 한국, 일본, 타이, 베트남... 내가 좋아하는 동양 음식은 참 골고루도 먹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여겼던 연애시절과 달리 나의 입맛만 우선시 여기는 나 역시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그래, 우리 네가 좋아하는 음식 먹으러 가자. 캐네디언 음식, 그거 먹자!
그는 여전히 피자를 외쳤지만, 나는 유치하게 피자는 이탈리안 음식이라는 이유를 대며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우리는 푸틴(그레이비소스와 모짜렐라 치즈를 얹은 캐네디언식 감자튀김)을 먹었다. 웨스턴 음식이 아닌 진짜 캐네디언 음식으로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메뉴였다. 그의 고향 퀘벡에서 유래했으니 안성맞춤이군. 그리고 그날, 우리는 음식 전쟁 중 첫 협상을 했다. 차례대로 돌아가며 외식 메뉴 고르기_ 다음날 나는 그가 고른 인도 음식을 먹으러 갔다.
#_ 휴전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온 집안에서 꼬릿 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우 이게 무슨 냄새야, 자기 방귀 뀌었어? 하고 돌아본 그의 손에는 블루치즈가 들려있었다. 순간 그래, 내가 순대국밥을 먹을 때 그가 느끼는 마음이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음식 전쟁의 휴전을 선포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갓 만든 신선한 김치는 맛있지만 쉰 김치는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이틀 연속 느끼한 웨스턴 음식을 먹으면 다음 한 끼는 반드시 쌀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자극적인 냄새의 음식도 서로 먹고 싶은 만큼 먹는 것에 동의했다. 대신 그날 각방에서 자는 것에는 서운해하지 않기로. 그리고 상대방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적어도 한 번은 함께 먹어주기로.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더 존중하게 되었다. 도란도란 식탁에 앉아 나는 김치볶음밥을 먹고 그는 브리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 날에도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삼십여 년간 지구 반대편에서 각자 다른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요리하기가 귀찮았던 나의 엄마는 수제비를 끓였고 그의 엄마는 나쵸를 만들었다. 쌀밥에 김치나 동그랑땡 같은 밑반찬이 학창 시절 나의 도시락이었던 반면, 그의 도시락은 주로 샌드위치나 맥 앤 치즈였다. 나는 몸이 아프면 죽을 떠올리지만 그는 치킨 숩을 떠올린다.
이토록 문화도, 언어도, 음식도 달랐던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그 다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을 함께해도 끝끝내 상대방의 전부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의 목표는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존중에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우리의 음식 전쟁은 휴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