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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로부터 450km 떨어진 곳에는 Shuswap이라는 큰 호수가 있다. 그 호수 주변에는 천 명, 혹은 이천 명 남짓의 주민들이 사는 작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그 끝자락에 자리한 Blind bay가 시부모님이 은퇴 후 마련한 보금자리이다.
우리는 긴 연휴를 맞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작해야 일 년에 한 번 방문하는 시댁이라지만 다섯 시간의 운전 거리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BC주의 중북부는 밴쿠버의 나긋한 날씨와는 달리 변화무쌍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가을이면 많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나마 지금이 운전을 하기에 가장 적기인 것이다.
신랑이 운전을 하는 동안 나는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방목된 말과 소들이 풀을 뜯는 모습과 키가 어마어마한 나무들을 보는 것은 캐나다 생활 십 년 차에도 여전히 낯설고 신기했다. 비교하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데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도시들 외에는 보이는 전부가 산이요, 물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듯 고요한 풍경. 그곳에서는 마치 시간마저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직도 정리할 것이 많은가 봐. 제대로 관광할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괜찮아?
시부모님이 이곳으로 이사 온 지 횟수로 이 년. 신랑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젊은 힘이 필요한 일들은 집안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거실 천장에 달기 위해 마련한 팬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놓여 있었고 아래층에는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책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노부부의 힘으로 옮기기엔 확실히 벅찬 물건들이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관광은 무슨. 나도 나름 할 일이 많다고.
최근의 나는 마음이 참 바쁜 사람이었다. 사 년간의 동업을 끝으로 이직을 했고 온라인 학위 과정도 시작했다. 어느새 나이는 마흔이 되어가는데 딱히 손에 잡히는 인생의 성과가 없다고 여겨졌다. 주일마다, 매일마다, 매 시간마다 나를 분주히 굴려야만 뭔가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가방에 차곡차곡 담아온 조바심은 시댁에서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틈만 나면 온라인으로 수업 내용을 확인하고 제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리포트를 작성했다. 머릿속으로는 집에 가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일주일의 to do list를 정리했다. 마침내는 여유롭게 읽으려고 가져온 책마저 도서관 반납을 앞두고 끝내야 할 짐처럼 느껴졌다. 시간을 작은 파편으로 쪼개어 사용하는 바쁜 도시인의 일상. 그것을 한 순간 내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거 맛 한번 볼래?
거실에 앉아 과제를 하는 사이 시어머니가 민트 모히또를 만들었다. 마당 한편에서 자란 민트의 향이 쨍한 날씨에 맞게 상쾌했다.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켜자 한창 열중하던 과제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아버지와 신랑이 마당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도 하던 일을 놓고 모히또를 마시는 중이었다.
저녁에 먹을 샐러드도 여기 마당에서 키운 것들로 마련하면 돼. 허브랑 야채들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시간이 조금 걸려도 이렇게 만들어 먹으면 훨씬 싱싱하고 맛이 나지.
오후 세 시. 시어머니는 벌써부터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걸려도 이렇게 만들어 먹으면 훨씬 싱싱하고 맛이 나지. 나는 조바심 가득한 마음을 고깃 고깃 접어 두고 시어머니를 도왔다. 느리지만 여유 있는 그녀의 행동을 흉내 내면서.
사실 손수 만들고 가꾸기를 좋아하는 것은 시아버지이다. 아래층 창고에는 그가 지난 일 년 동안 만든 수제 와인이 가득했는데 우리는 그중 하나를 저녁식사 중에 곁들이기로 했다.
아직 맛이 나진 않을 텐데...
그는 처음 만들어 본 와인을 선보이는 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사실 와인의 맛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진 못했다. 더 오랜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했을까. 아니면 와인을 만들기 위한 연습이 더 많이 필요했을지도. 어쨌든 우리에겐 시아버지의 첫 수제 와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었으니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 맛있는 와인의 탄생은 오늘이 아니어도 되었다.
저녁을 먹는 사이 바깥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아버지와 신랑이 마당을 꾸미기 위해 옮겨 놓았던 모종과 널빤지들을 미처 정리할 새도 없이 깜깜해진 것이다. 마당 한편에서는 며칠 전 배달되었다는 자갈들이 작은 산을 이룬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걸 먼저 정리했어야 했는데. 내일은 마당부터 얼른 해치우죠.
급할 것 없어.
늙은 아버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마음에 걸린 신랑의 말에 시아버지는 밍숭한 와인이 담긴 잔을 비웠다.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우리는 Shuswap 시각대에 살고 있어. You are on Shuswap time."
오늘 다하지 못해도 괜찮아. 매일매일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내일은 다 같이 동네 구경을 하러 가자. 오늘은 일찍 자고. 시아버지가 나의 빈 와인잔을 채워주며 덧붙였다. 순간 조바심 가득했던 내 마음도 그가 만든 와인처럼 밍숭해졌다.
내게 밴쿠버의 첫인상은 작고 여유로운 도시였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도시. 느림을 즐길 수 있는 도시. 그런 의미에서 내게 십 년 전 밴쿠버는 지금의 Shuswap과도 같았다. 그랬던 밴쿠버가 언제부터 정신없는 도시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 나는 언제부터 스스로의 눈치를 보는 바쁜 현대인이 되어버린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다시 다섯 시간을 걸려 450km를 운전했다. 시댁 마당의 자갈은 여전히 한편에 산을 이루고 있었고 나의 리포트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떠난 뒤 시아버지는 오랜 기간 조금씩 공을 들여 자갈을 펴고 마당을 꾸밀 것이다. 나 역시 못다 한 리포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며칠쯤 고생하겠지. 대신 우리 가족에게는 pedding zoo와 winery에서 함께 보낸 시간의 추억이 생겼다.
눈에 보이는 인생의 성과는 내 나이가 마흔이 되었다고 해서 생일 선물처럼 짠, 하고 나타나진 않는다. 그것은 시어머니가 키우는 식물들처럼, 시아버지가 만드는 와인처럼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숙성시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필요한 것은 조바심이 아닌 마음의 여유이다.
오늘 다하지 못해도 괜찮아.
매일매일,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