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이 사라진 풍경에 대하여

by Ray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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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아기 사슴들이다!

꼬마 Reed가 신이 나서 외쳤다. 우리가 멈춰 선 길 너머에는 작은 사슴 두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산책길에 사슴이나 너구리를 만나는 경우가 흔한 동네라지만 네 살 아이의 눈에는 매번 처음 겪는 일처럼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기자기하게 단장한 타코 하우스 옆 공터. 풀 대신 시멘트가 깔리고 울타리로 둘러싸인 저 공간을 아기 사슴들은 어떻게 들어갔을까.


그거 알아요? 이 가게 타코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Ellie는 사슴보다 타코 하우스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 나도 맛보고 싶은데 오늘은 가게가 닫혀있네. 나는 아이들을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덟 살 Ellie의 세상을 뒤흔들 만큼 맛있는 타코가 사슴들을 공터로 불러 모은 까닭은 아닐 터였다.


어머나, 불쌍해서 어째. 저기가 사슴들이 자주 지내던 공간이었는데. 타코 하우스가 생기면서 터를 닦고 주차장을 만들었거든. 평소 오고 가던 버릇으로 저길 들어간 모양이야.

Kirsten은 아기 사슴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발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공터 너머로는 온통 풀밭 천지였다. 사슴들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음이 분명했다. 늘 다니던 길, 자주 지내던 공간. 본능에 따라 익숙한 곳을 찾아왔을 뿐인데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해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기 사슴들은 공터 안에서 몇 발짝을 움직이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먼길을 걷는데 익숙지 않을 것 같은 가느다란 다리와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는 큰 눈망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리는 집에 가자고 재촉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겨우 발길을 돌렸다.




Sunshine Coast에서 자란 Kirsten은 요즘 들어 부쩍 이 동네가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West Vancouver에서 페리로 40분 정도 이동하면 만날 수 있는 동네 Gibsons. 그래 봤자 오천 여 명의 주민이 전부인 작은 타운이지만 소소한 변화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최근 계획적으로 조성된 하우스 단지는 새로 이사 온 가족들로 북적였고, 새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고르는 현장도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확실히 내가 처음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몇 해 전과는 다른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비슷비슷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젊은 가족들이 많은 편이야. 스무 살 즈음에 학업이나 취업을 위해 떠났다가 결혼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 밴쿠버 지역과 견주면 집 값이 훨씬 저렴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부동산 가격이 주춤한 요즘이라지만 최근 십 년 사이 꾸준히 오른 값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외지에서 자본이 유입되면 치솟은 주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토박이도 생기기 마련이다. 젠트리피케이션. 너른 들판이 있던 자리에도 이런저런 가게들이 생겨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던 타코 하우스도 그중 하나였다. 제법 비싼 렌트 비용 때문일까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분위기 때문일까. 타코 하우스의 음식들은 생각보다 값이 나갔다. 조용한 동네에 먹거리와 할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원치 않는 일들도 일어나고 있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이라든가 길을 잃은 아기 사슴들이라든가. 이를테면 그런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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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 태어난 나 역시 비슷비슷한 동네를 옮겨 다니며 자랐다. 국민학생으로 불리던 때만 해도 주변에는 논밭이 넘쳐났고 동네 아이들의 생활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특별히 잘 사는 집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도 흔치 않았던 서민들의 동네. 오래된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 사이에는 더러 연립 주택이나 빌라들도 눈에 띄었다.


그중 막다른 길 앞. 혼자 절반쯤 삐죽하게 튀어나온 작은 이층 집에서 나는 아홉 살부터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열 번이 넘는 해를 보냈다.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늘 거기서 거기는 아니란 걸 알게 되었고 언니와 함께 써야 했던 작은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늘어났다. 하지만 마냥 미워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담긴 동네였다. 친구들과 함께 걷던 등굣길, 작은 수영장이 있던 낡은 유원지, 스케이트장 대신 이용했던 꽁꽁 언 논밭. 큰길을 따라 내려가면 엄마와 우리 자매가 주말마다 가던 대중목욕탕이, 재래시장 구석에는 우리 가족의 단골 순대국밥집이 있었다. 여고 시절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종종 사 먹던 포장마차 우동, 집 근처와 시내 중심을 통과하던 3번 버스,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첫사랑과 손을 잡던 기억까지. 값비싼 고층 아파트 하나 없는 초라한 동네였지만 내게는 구석구석 추억이 얽히고설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장소였다. 늘 다니던 길, 자주 지나던 공간. 눈 감고도 찾아다닐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그 공간을 어떻게 초라하다는 이유만으로 미워할 수 있겠는가.


몇 해 동안이나 매물로 내놓았던 우리 집은 분양받은 아파트 입주일이 가까워져서야 기적적으로 팔렸다. 나는 낡고 작고 심지어 길 앞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못난이 집을 거둬준 새 주인이 참 고마웠다. 우리 가족이 떠난 뒤에도 누군가는 그곳에 남아 집 한편에 손때를 입히고 동네 골목길에서 추억을 쌓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덜 시리게 느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사 년 전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버스는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큰 도로를 끼고 사방으로 둘러진 철조망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선 동안 나는 재빠르게 창밖의 풍경을 훑었다. 철조망 너머 재개발이 한창인 낡은 주택가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했다. 스산하고 적막한 골목의 풍경. 내가 알던 동네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너 몰랐어? 거기 주택들 싹 갈아엎고 브랜드 아파트 단지 생기잖아. 재개발되면서 그 동네가 얼마나 비싸졌는데. 엄마가 다니던 재래시장 생각나지? 그쪽은 진즉에 다 바뀌어서 지금 완전 딴 세상이라니까. 그 집 안 팔고 있었어야 했다고 아빠가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하긴 너는 이제 거기 사람 다 됐으니 여기 돌아가는 사정을 알리가 있겠니. 언니는 이제와 웬 뒷북이냐는 듯이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랬구나. 시간이 이만큼 흘렀는데 변하지 않는 게 더 신기한지. 스스로를 다독여 봤지만 괜스레 마음까지 스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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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sten의 집.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낮에 본 어린 사슴들을 생각했다. 삶의 일부와 같이 익숙했던 곳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을 때의 낯섦.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울타리 안을 헤매던 사슴들의 모습에서 나는 사 년 전 한국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그 동네는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어 있겠지. 익숙함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나도 길을 잃은 사슴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매게 될까.


해변이 멀지 않은 아름다운 동네. 이곳의 조용한 밤에는 벌레처럼 작은 생명들도 큰 소리를 낸다.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길 위로는 크고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비싼 집들이 들어서더라도 오늘 밤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Reed와 Ellie가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시간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이었으면 좋겠다.





** Photo by Scott Carrol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