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사업의 이면을 돌아보다
Ⅰ. 서론
‘도시화’란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적 생활양식이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도시화의 결과를 단순히 물리적 팽창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는데, 도시화는 사회변동, 새로운 도시 문화의 성장, 도시민의 심성 변화 등 삶의 방식 자체의 변화를 함께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화의 시기를 맞이하는 사회는 도시민들의 삶의 변화를 살피는 데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도시인 프랑스의 ‘파리’ 역시 도시화를 맞이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19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에 걸쳐 일어난 두 번의 도시화는 파리를 현대의 유럽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먼저 전반기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해 도시의 공장들에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들이 운집하면서 인구의 집중 단계의 도시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의 파리는 그런 변화를 수용할만한 도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정부는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근대 도시를 향한 개조사업을 추진해야했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의 주도 하에 20년에 걸쳐 이뤄진 ‘파리개조사업(오스만 사업)’은 이처럼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한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시화는 단순히 도시의 팽창, 통계와 외관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스만의 개조사업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 사업의 의의는 근대 도시 경관으로의 변화는 물론, 당대인들의 집합적 삶의 양식을 근대화된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스만 사업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새로운 근대적 생활이 파리의 모든 도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파리의 ‘도시민’에는 노동자들의 고용주이자 높은 재정, 교육수준을 기반으로 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부르주아 집단과, 이들의 피고용자이자 단순노동 일자리를 찾기 위해 운집한 하층민을 의미하는 노동자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집단은 오스만 사업 이후 명확한 경계를 두고 분리되는데, 아래의 본문에서는 두 집단의 생활공간 변화와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오스만 사업으로 인한 도시화의 결과를 살핀다. 또한 왜 오스만 사업이 공공성 있는 결과를 낳지 못했는지, 그로인해 19세기 말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Ⅱ. 본론
1. 오스만 사업의 목표와 결과
오스만 사업은 당대의 혼란했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대응을 위해 계획되었기 때문에 사업의 성과와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조사업 이전의 사회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반의 파리는 제철소, 기관차 공장 등이 들어선 대규모의 산업도시로, 공업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노동자 인구만 14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열악한 주거 환경, 취약한 공중위생, 극심한 사회적 불안 등의 사회문제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정책적 해법으로서 오스만 사업이 등장했다. 나폴레옹 3세가 파리 개조사업을 위한 연설에서 사용한 ‘새 길’, ‘밀집 지역들을 정화’, ‘유익한 햇빛’ 등의 표현 역시 도시 정비 차원의 사업 목표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오스만 사업은 총 3차에 걸쳐 구도심부터 외곽까지의 개조 작업을 실시하는데, 그 결과 파리의 구조는 크게 다섯 가지의 변화를 맞게 된다. 첫째, 도시 소통망이 확충되었다. 1차 사업 시기 구도심지역부터 사업시기 파리 외곽지역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건설된 넓은 직선의 가로는 센 강을 중심으로 동-서, 남-북을 잇는 도시구조를 확립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연결된 12개의 방사형 도로는 이전의 비좁은 가로를 대신하였고, 이는 통행기능은 물론 파리의 거대함과 위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역할도 해냈다. 직선의 가로 경관은 단조롭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통일감을 조성하고 역사적 기념물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둘째, 상·하수도망과 녹지공간을 확대했다.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급수시스템과 맑은 공기를 제공하는 숲과 공원의 등장은 파리의 위생상태를 획기적인 개선으로 이어졌다. 두 시스템의 확대 규모는 상당했는데, 오스만 사업 기간 동안 상수도망은 약 2배, 하수도망은 약 3배 이상의 시설이 신설되었고, 녹지 공간 역시 두 개의 숲, 3개의 공원 등 어느 시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시 속의 녹지가 구축되었다.
셋째, 다양한 공공건물과 문화시설이 새로 건설되거나 확충되었다. 병원, 상업재판소, 시장, 극장, 경찰서, 교회, 오페라 등의 시설들이 대폭 정비되었으며, 이러한 시설들은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이용이 편리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었다. 넷째,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오늘날의 파리 영역을 형성했다. 도시화 과정에서 늘어난 인구와 시설들을 감당할 공간을 확충하기 위해 파리 시는 주변의 11개 코뮌을 흡수하며 도시외곽으로의 확장을 이루었다. 외곽도로는 새로운 파리 시의 경계를 명확히 하였으며, 20구 80구역이라는 새로운 행정체제가 정비되었다. 다섯째, 건축 규제를 통해 도시 외관의 통일성이 만들어졌다. 이 때의 건축규제란 오스만 사업에서 철거 후 조성되는 건축물에 적용되었던 계획 규제 중 하나이다. 규제의 종류는 다양했는데, 위생 정비의 목적 하에 빛과 공기의 유입을 위한 광정 조성이 의무화된 것이 우선이었다. 또한 이전의 좁은 공동 주택은 철거되고 세워진 아파트에 대해서도 4개 층 이상의 분할, 16m 이상의 높이, 동일한 건축선, 발코니의 연속성, 동일한 지붕 등의 규제를 적용해 규칙적인 오스만식 도시 경관이 만들어지게끔 했다.
약 17년간 위의 다섯 가지 변화를 일관되게 추구했던 오스만 사업은 그 목표를 완전히 달성한 듯 했다. 통계적 수치로만 보아도 개조사업 이전 6만 6천 가구 주택 중 2만 7천여를 철거하고 10만여 주택이 새롭게 건립되었으며, 파리의 면적은 개조 사업 이전보다 약 2배 이상, 인구는 약 4배 이상이 늘어나 160만 명에 달했으니 파리는 완전히 새로운 산업도시로의 완성에 이른 듯 보였다. 근본적으로 국가가 주도한 하향적인 도시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사업은 공공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곤 한다. 제 2제정기 당시 권력의 형태나, 계층적인 사회구조를 감안할 때 가로의 정비와 기반시설의 배치가 부유층 거주지역과 서민 밀집 거구지역에 동등하게 진행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파리의 공원이 모든 계급의 출입, 이용을 허용하게 된 점 역시 공공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평가받고 있다.
2. 오스만 사업의 공공성이 가지는 한계
오스만 사업은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사업 과정에서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한 도시 계획은 무자비한 파괴의 방법으로 진행해나갔던 점에서 여러 부문의 문제점들을 초래했다. 국가 주도의 개조사업이었던 오스만 사업이 어떻게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이는 그 시기 부르주아라는 계층의 사회적 지위를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다. 당시 프랑스는 공화국과 제정을 오가며 정치적 혼란기였고, 제정기임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국가의 독점적 주체는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도구에 가까웠으며 국가 정책은 의사와 엔지니어 등 부르주아 집단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즉, 오스만의 도시개조 사업은 부르주아에 의해 주도되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구조, 이를 수용해야 했던 정치권의 사회전략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만 사업을 통해 부르주아가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질병과 혁명의 차단이었다. 이 두 가지는 1800년대 유럽을 통틀어 도시 중산층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는데, 특히 이는 지역, 계급과 연대되어 빈곤계층, 즉 노동자 집단이 근원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19세기 초 사회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인데, 집단 소요사태의 중심적인 민중 권력이었던 노동자들이 도심에 거주하는 것은 실제 혁명을 통한 정부 교체를 목격한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또한 밀집 지역의 비위생적인 환경은 1830년대 콜레라의 대규모 확산을 낳았는데, 이는 파리 전역을 휩쓸며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부르주아는 이러한 전염병의 원인이 빈곤계층의 불결함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가난과 불결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혁명과 전염병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도시개조사업이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방향으로 진행된 원인이었다.
이와 같은 숨겨진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던 오스만 사업은 여러 가지 성과들과 함께 부르주아의 요구에 맞추어 도시 공간의 계층적 분화를 완성시켰다. 오스만은 위생 문제를 해결을 내세우며 비위생적이던 서민주택과 빈민 주거지를 개조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오스만의 사업기간 동안 약 12만 호의 주택이 철거되었고, 시테 섬 같은 빈민 주거지는 거주 인구를 1/3로 줄이는 등 극단적인 파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철거되는 주택에서 내몰린 노동자들에 대한 대응책은 없었고, 오히려 서민 주택 자리에는 수익률 높은 부르주아 저택이 들어서고, 임대료는 약 3배 이상 상승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새롭게 파리에 편입된 주변 구, 외곽 지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동북, 동남 지역으로 쌩 안뚜안느 같은 노동자 밀집주거지역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계층의 공간적 분리는 위생문제뿐만 아니라 혁명의 위험요인을 통제하기 위한 대처의 결과이기도 했다. 두 번의 도시혁명에 의해 등장한 제2제정기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군중의 힘을 잘 알고 있었으며, 혁명의 중심 권력이 되곤 하는 노동자들을 통제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도시 중심부에서 노동자 주거지를 철거시켰고, 그로 인해 외곽으로 몰려난 노동자들의 밀집지역을 격리시킴으로서 통제하고자 했다. 또한 이전의 도시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비좁고 불규칙한 도로를 바리케이드 삼아 투쟁했던 점에서 도로망의 재정비를 대규모로 시행하였다. 오스만 사업으로 등장한 넓은 직선도로망은 폭동진압을 위한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경로였으며, 사전에 집단 소요 자체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새로운 도로를 통해 노동자 밀집지역의 효과적인 격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통소통, 환경개선, 토지의 제공, 경관 미화 등의 목적을 내세우며 등장한 직선 도로망은 군중의 통제 측면에서도 훌륭한 전략적 미화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3. ‘근대 도시’ 속 노동자의 공간
17년간 이어진 대규모의 도시개조사업은 파리를 완전히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부르주아의 주도 하에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공간은 점차 명확히 분리되는데, 파리의 서부는 부유한 부르주아의 구역이, 북·남부에는 노동 계급 구역이 잡게 되었다. 공간의 분리에서 이어지는 문제점은 새로운 근대 도시의 문화, 생활이 노동자의 공간에는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곽으로 몰려난 노동자들은 도심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타자화 되는 존재였고, 노동자들은 확충된 주택도, 여가시설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도심 속의 오페라, 병원, 시청 등 근대 시설들은 도심에 거주하는 부르주아에게는 새로운 근대 문화로 받아들여졌지만, 외곽의 노동자들에게는 비민주적인 계급 사회의 속 또 하나의 상징물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의 생활 속에는 문화시설과 공공시설 이용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스만 사업의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인 상하수도망의 정비 역시 노동자 거주지역에는 주어지지 않은 근대 도시의 혜택이었다. 상하수도망은 비위생적 주거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방법이었지만,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오스만에게 노동자 지역인 외곽까지의 상·하수도망 시설 확장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오스만 사업 기간 동안 파리의 하수도망은 163km에서 536km로 약 3배 이상 늘어났지만 이중 대부분이 파리 서쪽의 부르주아 구에 집중되었으며, 노동자 밀집 지역인 구와 파리 외곽에는 새로운 하수도망 시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오스만이 사직한 후 20세기까지 이어진 3차 오스만 사업을 통해 외곽의 근대 시설 정비 사업이 이뤄지긴 하지만, 이는 거의 50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20세기에야 완성되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노동자들의 삶 속 위생문제 개선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상하수도망의 미비와 함께 노동자들을 비위생적 생활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또 다른 문제는 주택문제였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는데, 첫째, 앞서 설명했던 대로 19세기 전반기의 서민주택은 오스만 사업의 주 철거대상으로 대개 파괴되었고, 부르주아 저택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주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둘째, 파리는 지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인해 주택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했다. 게다가 인구 유입의 규모 역시 적지 않았는데, 아래의 <표1>에서 드러나듯 19세기 중반에도 인구 증가율은 약 20%에 달했고, 이는 <표2>에서 알 수 있듯 파리가 프랑스 전체인구의 20%을 흡수한 결과였다. 이처럼 해결되지 않는 주택문제는 단순히 노동자 집단의 열악한 주거환경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매춘과 근친상간 등의 도덕문제, 도심의 공장과 멀리 떨어져 발생하는 노동의 질 하락 문제, 월세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월세 문제에 있어서 파리의 집세는 오스만 사업 이후 약 2배 이상 인상되었는데, 이는 <표3>과 같이 노동자 가구 수입의 15-20% 이상을 차지했기에 노동자 집단의 경제적 결핍 문제까지도 야기했다. 오스만 사업 이후 19세기의 파리는 근대도시였지만, 노동자에게 19세기의 파리는 변함없이 고통스러운 일상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Ⅲ. 결론
이처럼 오스만 사업은 초기 사업 목표로 내세웠던 공공성을 완벽하게 달성하지 못했다. 물론 이에 대해 오스만을 변호할 수 있는 의견은 많다. 계급사회였던 당시에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나 사회적 중심세력이었던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는 의견들 역시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파리의 근대 속에서 소외되었던 노동자들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19세기의 파리는 외관적으로 근대 도시였을 뿐 사상의 근대화는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근대를 향해왔지만 이는 결국 중산층이었던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에 이용되었을 뿐, 진정한 자유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하층민이자 빈민층이었던 노동자들은 여전히 권력의 횡포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근대화를 외치며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도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둘째, 오스만화로 인한 노동 계급의 소외 문제는 노동문제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오스만화 이후 노동자들은 주어진 공간에 수긍하던 이전과 달리 고통스러운 일상을 개선하고자 노력했고, 이는 노동조합의 결성과 노동 운동으로 이어졌다. 계급의 공간적 분리는 삶의 수준에 차이는 만들어냈지만 근대 사상의 유입이나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의지나 분노는 완전히 분리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삶의 공간이라는 요소는 저임금, 과도한 업무량 등의 공장 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의 중요한 한 단면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물론 오스만 사업은 여전히 파리를 세계 최초의 계획적 근대 도시로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고, 그렇기에 도시의 외곽지역에 소외된 노동자 공간에 관심을 돌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잠시 눈을 돌려 소외된 노동자들을, 그들의 공간을 바라보았을 때 19세기의 파리 사회를 더 알아갈 수 있는 중요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근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열악함, 불결함 등의 노동자들의 공간의 특징만을 고려한다면 노동자 계층은 물론 그들의 공간조차 근대로의 이행에 뒤처진 대상으로서 여겨지며, 역사 서술 속에서조차 그들을 소외시키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들을 뒤떨어진 대상이 아니라 파리라는 한 도시 속의 동등한 도시민으로 놓고 19세기를 바라볼 때에는, 이들은 당시 사회의 정체성과 현실을 드러내는 근대화 이면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근대화된 파리 속에서 소외되고, 중세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던 노동자 계급이지만, 모순되게도 그들을 배제한다면 19세기 파리의 근대를 진정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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