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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숨겨진 칭기즈칸의 딸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by 현이

Ⅰ. 서론


‘남존여비’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주로 사용되는 해석 틀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를 통틀어 보아도 여왕의 수는 손에 꼽고,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까지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역사 속의 여성은 가정에서, 남편의 뒤에서 내조에 힘쓰고 복종해야할 존재였을 뿐, 지도자·통치자로서 전면에 나서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 틀은 타국의 역사를 바라볼 때도 고정관념으로 작용했는데, 이로 인해 황제를 비롯한 남성지도자, 남성 영웅을 중심으로 하는 해석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리고 ‘몽골’의 역사 역시 이러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대상 중 하나이다. 전 세계의 반절을 지배할 만큼 강력했던 제국은 칭기즈 칸, 우구데이 칸, 쿠빌라이 칸 등 남성 칸들로 이어지는 계보만으로 설명되어 왔고, 제국의 존재 역시 이들의 능력과 노력의 성과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 페르시아 등 타국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고정관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들이 존재한다. 제국의 창건자인 칭기즈 칸은 전장에 아끼는 왕비를 동행했고, 공주들을 전략적 요충지의 지도자로 세웠다. 심지어 이 여성들은 “칭기즈 칸은 국가를 창건했지만 국가에 생명을 부여한 것은 왕비들이었다.”는 평가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인재들로서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의 가치관에 따른 해석 틀을 이유로 몽골제국의 역사 속에서 여성을 배제시키기엔 그녀들이 상당히 핵심적인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유목 생활로 인해 완전히 다른 경제 체제, 생활 방식을 가진 이들에게 일관적인 역사관을 적용하려 한 것은 왜곡되고 부족한 해석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전제였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시작점으로 돌아가, 몽골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특히 몽골제국에서 여성들이 왜, 어느 정도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는지 살펴보려한다. 이는 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여성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의의뿐만 아니라 몽골제국의 발전과 쇠락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Ⅱ. 본론

1. 전통적인 몽골의 성(性) 가치관

몽골 사회는 초원의 이동 유목경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정착 농경을 기반으로 한 문명권의 유학 가치관을 적용하기 어렵다. 특히 두 사회는 성 가치관에서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문명사회와 달리 초원의 구성원들은 성에 따른 사회적 역할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초원의 생활·경제적 환경은 단순한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것만으론 생존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따라서 여성들 역시 생존을 위한 실질적 역할을 해내야 했다. 유목 생활 중 남성들이 사냥을 떠난다면,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사냥의 성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관리하고 이끄는 능동적 주체로서 행동했다. 가축들을 포식동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활과 화살을 능숙히 다루었으며, 무술 훈련을 받는 것 역시 일상적이었다. 또한 요리, 바느질, 가축 젖 짜기를 비롯한 가정의 대소사까지도 여성의 몫이었으며, 이는 가장의 역할과 같았다. 즉, 유목 사회 속 여성의 노동은 부수적·종속적인 것이 아닌 실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몽골 사회는 일상생활 외에서도 여성에게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 존중하며 남녀 역할의 균형을 이루는 것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몽골의 기록, 역사로부터 전해져온 여성에 대한 신성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몽골인들은 아버지는 하늘로, 어머니를 대지로 비유하며 이들의 균형적 세계관이 유지되어야 개인, 가정, 국가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음양의 조화,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제도나 정책들은 늘 필생의 사업으로 여겨졌으며, 쿠릴타이라는 국가 중요 회의에 여성이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것도 균형의 유지라고 생각했다. 또한 쿠릴타이의 개최장소 역시 조화를 중시했는데, 풍요로운 대지의 원천인 강과 호수, 하늘과 맞닿는 산의 중간지점을 개최장소로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같이 음양의 균형을 추구하는 세계관은 산을 상징하는 칸과 강과 호수를 상징하는 카툰의 균등한 지위를 받아들이는 전제가 되었으며, 이는 황실 너머에서도 여성을 독립적이고 자율성을 가지는 주체로서 인정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위와 같은 사상에 더해 전해진 『몽골비사』의 ‘알란 코아(Alan Qo'a)’ 신화는 몽골 여성들을 성적 구속에서 까지도 해방시켜주었다. 칭기즈 칸의 혈통적 선조 중 10대 조(祖) 도분 메르겐의 미망인이었던 ‘알란 코아’는 하늘의 빛을 품어 칭기즈칸 씨족의 선조인 세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는 그녀의 세 아들들을 ‘하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남편의 부재 속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부도덕함이라는 도덕적 굴레보다는 신성성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신화의 신성성과 함께 초원 경제에서의 노동력 확보가 중요한 가정문제가 되면서, 이후 몽골 사회에서는 ‘개방성’의 풍조가 자리잡게 되었다. 칭기즈 칸 역시 첫째 아들 주치의 혈통적 문제에ㅈ도 친자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황실 외에서도 남편 이외의 남성에게서 얻어진 자식들을 구성원으로 승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여성들이 사회적 비난에 대한 걱정 없이 재혼, 수계혼(收繼婚)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가진다. 초원 사회의 사상적·현실적 요인들은 몽골 제국 여성들에게 자유로운 성 가치관과 자율성을 부여했고, 이는 정치·경제적 이권에 따른 능동적 선택권으로 이어지면서 이후 ‘제국’의 성장과 유지의 주춧돌이 되었다.


2. 칭기즈 칸과 여성

칭기즈 칸은 널리 알려져 있듯 경이로운 정복원정으로 몽골제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데에는 그의 뛰어난 전투 능력, 리더십을 비롯해 시대적 상황 등 여러 요인들의 공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활약은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요소이다. 칭기즈 칸의 어머니, 부인들을 비롯하여 딸, 며느리들까지,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여성들은 제국의 정치·경제·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제국의 성장을 뒷받침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들의 활약은 아래의 네 분야에서 보다 뚜렷하게 나타났다.

첫째, 여성들은 혈연·정치적 동맹의 수단이자 이를 실현시키는 주체였다. 통일 제국의 건설은 곧 소규모 부족 생활을 포기하고 이족과의 정치, 군사적 동맹을 통한 다부족, 다민족 사회를 이뤄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칭기즈 칸은 정복과정에서 수많은 이족들과 정치, 군사적 동맹을 맺었는데, 이러한 동맹 관계의 견고함을 확인하는 가장 명확한 수단은 바로 혼인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혼인이란 유교적 틀에서 해석하는 여성이 시댁에 종속되는 노동력이 되는 수준의 관계가 아니었다. 몽골족의 여성들은 혼인 동맹을 통해 이족 사회의 왕비가 되었고, 남편보다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새롭게 정복한 지역과 부족들을 몽골제국의 일원으로서 통치해 나갔다. 이러한 우위적 관계는 칭기즈 칸이 혼인 동맹 시 내리는 결혼 포고령의 내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오이라트족에 시집보낸 딸 치체겐을 위한 결혼 포고령에는 사위의 이름은 언급조차 없었으며, 심지어 “너는 칸의 딸이기 때문에, 오이라트 부족민들을 통치하도록 파견되는 것이다.”라는 딸의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명시하는 문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치체겐 외에도 옹구드 족의 알라카이 왕국에 ‘알라카이 베키’, 위구르 왕국에 ‘알-알툰’, 칼루크족에 ‘톨라이’를 혼인관계를 통한 지도자로 확립시킴으로서 제국의 확대 영역은 보다 확고해져 나갔다. 이러한 딸들의 활약은 몽골 땅을 둘러싼 제국의 방패와 같았으며, 칭기즈 칸은 이를 신뢰했기 때문에 몽골 스텝지대에서 눈을 돌려 끝없는 정복 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둘째, 몽골 여성들의 전투에서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다. 몽골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말을 아주 잘 타고 궁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게르나 말, 수레 등의 관리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전장에 장군의 부인들이 함께 동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칭기즈 칸 역시 원정 시엔 황후들 중 한명을 꼭 동행했는데, 대표적으로 탕구트 정벌에 함께한 제 3황후 ‘예수이 카툰’과, 서아시아 원정을 따랐던 ‘콜란’ 황후가 의미 있는 공을 세웠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여성들의 공은 단순히 남편에 종속된 존재로서 해야 할 의무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공은 독립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그에 따른 보상도 주어졌다. 예수이 카툰은 위험한 원정 과정에서 후계자 지명을 이끌어냈다는 공에 따라 분봉에서 많은 재산과 하인을 물려받았고, 콜란은 뛰어난 판단력을 바탕으로 원정 과정에서 오르도 관리에 뛰어나 친정 식구들까지 성과급을 받고 제 1황후 다음가는 지위를 차지할 만큼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많은 기록들에서 ‘몽골 여성들은 활과 화살을 다루는데 능숙하다’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도층 외에도 일반 여성들 역시 전장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경제·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카툰들은 경제적으로 칸과 독립된 재산을 누렸는데, 초원, 농지를 분토받는 것은 물론 그녀들만의 ‘오르도’도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 오르도의 지출경비는 곧 황실 여인들의 투자와 소비 밑천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오르도는 일상적인 황실경제의 공간이자 제국 경제의 중심이 되어갔다. 특히 오르도 내에서 생활하는 카툰과 궁녀들은 호화스러운 생활, 장식을 위해 비단옷, 보석 장신구들을 소비하곤 했다. 이러한 수요는 곧 상인과 시장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오르도 주변엔 교역공간이 늘 따라다니게 되었다. 시장의 번성은 사치를 금하는 칸의 명령에 의해 축소되기도 했지만 카툰과 공주들 같은 황실 구성원들과 상인들의 지지를 이겨낼 수 없었고, 점점 그 규모는 커져갔다. 게다가 앞서 알라카이와 톨라이가 실크로드와 인접한 지역들을 장악함으로서 이후 몽골이 실크로드의 교역권을 주도했기 때문에 시장의 규모와 상품의 다양성 역시 발전되었다. 이는 제국 내에 선진적인 경제, 문화적 특권을 들여오는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회 요소라 볼 수 있다.

넷째, 정치적으로 몽골제국의 통치자로서 활약했다. 몽골의 왕비란, ‘왕의 아내’에 머무르는 개념이 아니었다. 왕비는 곧 여왕, 군주였고, 칸과 공동의 동등한 통치자로서 황실의 조회, 연향에 참석하거나 칸과 함께 보좌에 앉아 조하(朝賀)를 받곤 했다. 따라서 칸의 사후 후계자가 선출되지 못했거나, 섭정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황후들이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구데이 칸의 미망인인 투르게네는 우구데이 말년부터 아들 구육이 칸에 즉위할 때까지 국정을 장악했으며, ‘예게 카툰’의 자격으로 건축, 종교, 사회제도 등 다양한 분야의 제국 경영을 훌륭히 해냈다. 우구데이의 막내 동생인 톨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 베키 역시 우구데이 칸의 재혼 명령을 거부하고 홀몸으로 네 명의 아들을 키워 칸에 오르도록 했으며, 그녀의 아들 중 뭉케가 대칸에 즉위하기 이전 시기에도 구육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시가 혼란 속의 제국을 훌륭히 경영해냈다. 이처럼 카툰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칸의 계보 속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독자적으로, 훌륭히 제국을 이끌어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성들의 활약으로 ‘몽골 제국’을 경영하고, 그만큼 부인, 딸, 며느리들의 총명함을 아꼈던 칭기즈 칸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법적으로도 보호하고자 했다. 그가 제정한 제국의 법령인 ‘자삭’은 복원된 36개 조항 중 5개 조항에 남녀 관계가 직·간접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제 1항과 제 31항의 “간통한 간부는 극형에 처한다.”는 내용은 간통을 금할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남성에게 묻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제 19항에서는 “자신의 부군이 전장에서 후퇴할 경우 부군의 군직을 대행하라”며 여성의 전투 역량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으며, 제 34항과 35항에서는 재혼, 가산 계승에 대한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서 여성의 선택과 권리를 옹호해 주었다.. 자삭의 존재는 훗날 몽골 여성들이 독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근거였으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성의 지율성과 개별성을 인정했던 당시 가치관이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여성 권위의 한계와 함께 도래한 제국의 한계

여성들의 수많은 공적들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성장과 함께 공적 생활 속 여성의 역할은 점차 후퇴해 갔다. 몽골의 전통적 가부장 관념에 따라 대칸 직에 오른 칭기즈 칸의 남성 후예들은 그녀들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장려하기보다 그녀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우구데이 칸은 치체겐이 다스렸던 오이라트를 자신의 지배 아래 편입하기 위해 1237년, 그 지역을 대상으로 학살을 명령했다. 특히 이 학살 속에서는 칭기즈 칸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했던 법조문들과 그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공격 과정에서 소녀들을 대상으로 강간, 납치, 성매매 판매대상화 등의 악랄한 범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전장에서의 육욕 표출이 아닌 의도적인 행위였는데, 여성들의 권위를 무너트림으로써 칭기즈칸의 딸들, 즉 여성 통치자들의 권력을 공격하고 굴복시켰다는 점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여성’ 세력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여성 지도자의 출현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칭기즈 칸의 며느리인 투레게네, 에브스쿤이, 소르칵타니 베키와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내적, 외적으로 여성 통치자들의 한계가 도래하고 있었다. 먼저 내적으로, 여성들은 점차 자신들의 역할을 남성에 헌신하는 수동적 존재로 가두기 시작했다. 위 세 사람 역시 그러했는데, 그녀들은 이전의 알라카이 베키나 치체겐과 달리 아들의 대칸 즉위를 목표로 권력싸움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투레게네는 구육 칸을, 소르칵타니 베키는 뭉케 칸을 배출해냈으며, 그녀들은 평생의 삶을 아들을 위해 바쳤다. 또한 칸들은 여성들을 권력에서 밀어내기 위해 외적 상황을 변화시켰다. 먼저 구육은 자삭 법령을 새롭게 적용시키며 여성을 처벌 대상으로 만들었다. 칭기즈 칸이 모든 여성을 보호하고자 제정했던 자삭을, 몽골족이자 왕실가족에만 적용되는 법령으로 해석해 며느리나 공적 지위에 있던 이족, 일반인 여성들을 그 보호 범위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이러한 구육 식의 법률 적용 방법은 여성들을 향한 잔혹한 처벌, 공개 심문, 고문 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후대까지도 이어졌다.

문제는 이러한 적용방법이 황후들 역시도 보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몽골족이 아닌 이족에서 시집 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삭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황후의 권위는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공개적으로 대신들과 대립된 의견을 펼칠 경우 비난과 모욕을 받았고, 간통혐의가 씌워지면 법적 절차 없이 처형당했다. 특히 뭉케 칸은 알라카이 베키의 왕국 등 여성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있던 왕국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대학살을 자행하며 여성 통치자 자체의 권위까지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황후까지도 동의 없이 처형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처벌을 가했으며, 이후에는 여성에게 독립적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며 여성을 카툰으로 인정하는 샤먼이나 관리를 사형시키는 포고령까지 내렸다. 물론 이후에도 쿠틀룬, 오르기나 등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던 여성들은 여전히 몽골 역사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칭기즈 칸 시기처럼 여성이 자신의 능력으로 제국 통치에 기여할 수 있었던 사회는 점차 사라져갔으며, 대지와 하늘,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은 깨어졌다.

14세기, 제국의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불균형 현상이 보다 악화되었다. 여성은 통상적으로 궁정 귀부인과 같은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고려와 같은 복속국에 존재하는 독립적 권력기반의 왕비들도 이전과 같은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 권위의 하락은 곧 칭기즈 칸이 설립한 제국의 주요 규칙, 법률, 관습의 위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점차 문제점이 드러났다. 유목 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제국 속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던 여성이라는 존재를 배제시켰다는 것은 곧 사회 내의 능력, 인력, 역할의 부족으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당시 제국 내에서도, 원의 마지막 황제인 원순제가 불균형을 시정하려 다양한 예식절차에 따르는 성관계라는 수단까지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음양 균형의 붕괴를 문제점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미 약 100년에 걸쳐 제국의 여성들은 사회 중심에서 배제, 억압당해왔고, 남성들은 다시금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부여하기보다 단순히 예식과 의식에 의존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했다. 이는 결국 1368년 원의 붕괴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여성이 학살당하고 배제당하는 기이한 제국은 붕괴했다. 여성의 한계는 곧 제국의 한계와 함께했던 것이다.




Ⅲ. 결론

이처럼 몽골제국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굉장히 흥미롭게 다루어볼 수 있는 주제이다. 제국의 흥망성쇠를 훑는 역사의 과정 속 어디에서나 여성들이 무거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필자가 역사를 공부하며 접해온 몽골사 속에서는 그녀들의 존재감과 능력을 쉽게 확인해볼 수 없었다. 동남아시아, 유럽, 중국 등 다양한 나라의 역사 곳곳에 몽골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칸’, 남성 영웅의 정복원정과 군사능력만이 몽골제국을 설명해냈다. 하지만 본문에서 설명해왔듯 몽골은 우리와 다른 성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여성들의 업적들에 주목할 때 보이는 제국의 일면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라도 편향된 시각과 관점을 인지하고 몽골의 여성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가져올 의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새로운 관점은 더 넓은 이해를 가져온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 어떠한 결과도 단 하나의 원인을 바탕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몽골제국 역시 그러하다. 작은 초원 부족사회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제국이 몰락하기까지의 원인이 필자가 본문에서 중심적으로 다룬 여성의 활약이나 소외만이 아닐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남성 중심적 관점을 벗어나 여성의 입장에서 제국을 바라본다면 몽골제국의 역사는 분명히 새로워질 수 있다. 여성의 업적에 대한 재조명은 곧 제국의 경영, 칸의 부재, 카툰의 내치, 초원사회의 특징 등 몽골제국의 새로운 요소들에 대한 재조명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에 대한 연구는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방대하고 다양한 사료들이 남아있다. 이를 토대로 진정한 몽골제국을 알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가치관에 따르는 편안한 해석 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틀에 여성을 대입했을 때, 분명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둘째, 현대 사회에서 몽골제국이 갖는 의의를 확대할 수 있다. 몽골제국은 대개 제국적 특징인 세계화, 다문화성을 주제로 연구되곤 하는데, 이는 관용정책과 평등사상 등을 21세기 정책의 선례로서 보고자하는 시도다. 필자는 이와 함께 현대 우리 사회가 몽골의 여성상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성차별과 유리천장 등의 사회문제를 겪으며 양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에 있다. 반면 몽골은 과거 제국시절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성평등의 문화가 이어지고 있고, 여성들의 전문직종 종사비율이 남성보다 높은 점이나, ‘여성의 날’이 4대 국경일로 지정된 점이 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사회가 만들어진 데에는 몽골제국부터 이어진, 원 멸망 후 다시금 회복된 여성의 사회적 권위가 상당히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몽골은 초원, 유목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와 완전히 다른 환경,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새로운 가치관의 존재와, 이에 기반한 제국의 역사를 배우려는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이었던 유교 사상에서 벗어나, 여성의 새로운 특성에 주목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몽골의 역사와 가치관 역시 선진적이고 반드시 따라야하는 대상은 아니지만, 비록 타국일지라도 여성의 업적을 인정하고 재조명하는 역사적 태도는 우리의 사고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 줄 것이다.




< 참고문헌 >

1) Jack Wearherford, 이종인 역,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책과함께, 2012).

2) 김광웅, 『미스 프레지던트』 (21세기북스, 2012).

3) 설배환, 「몽골제국에서 황실 여성의 位相 변화」, 『역사학보』Vol.228(역사학회, 2015).

4) 해인, 『몽골의 페미니스트 왕비들 : 몽골은 어떻게 양성평등 사회가 되었는가?』 (운주사, 2015).

5) 宮脇淳子, 조병학 역, 『몽골유목제국』 (白山出版社,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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