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5
책 제목에 이끌려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영화라고는 예술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락영화류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선'과 '영화'라고 하니 끌렸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감독인 '나운규'감독의 수필을 엮은 책이다. 극본까지 스스로 썼던 극본가 겸 감독이었던 그의 필력이 흡입력있다. 책도 다른 책에 비하면 짧은 편이라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읽다보니 현대가 많이 겹쳤다. 시간대도 처한 상황도 많이 다르지만 감독의 열정, 포부같은건 현대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나운규 감독은 영화를 찍는데 끌어올 수 있는 자본이 없어서 최대한 아껴서 찍어야한다, 영화를 다 찍고 나면 검열이 들어와 내 것이 더이상 아니게 된다 같은 이야기를 썼다. 자본과 검열, 이것 조차 현대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광고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짧게 일하고 도망쳤지만). 물론, 영화는 아니지만 광고는 보통
'광고주의 의뢰 → 광고 대행사에서 스토리보드, 모델 선정 등 광고주와 협의 → 협의 이후 프로덕션에 촬영 의뢰 → 프로덕션이 포스트 프로덕션에게 편집과 후보정 의뢰' 라는 과정을 거친다.
포스트 프로덕션 편집실에서 만든 임시 편집본은 프로덕션 담당자가 와서 컷을 가려내고, 재편집한 편집본을 다시 광고주가 보고 컷을 가려낸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편집을 하고 편집 완성본을 2D, 3D팀으로 넘긴다.
2D, 3D팀에서는 후편집을 하는데, 2D팀에서는 보통 합성, 자막, 여러가지 후보정을 하고, 3D팀에서는 광고에 들어갈 3D를 제작 후 2D팀에게 넘긴다.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까지 길게 하냐면, 저 과정에서 광고주의 입김이 단 한번도 들어가지 않는 적이 없다. '검열'이 들어가는 것이다. 근데, 모든 돈은 광고주에서 내는거니까 현대에는 '자본'과 '검열'이 거의 한 몸 처럼 돌아다니는 것이다.
나운규감독이 말한 것은 이에 딱 맞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시대에서는 조선인이 무슨 영화는 영화냐며 무시와 멸시를 받았고, 조선인의 영화사에, 영화에 투자를 할 사람들은 없었으며, 그래서 아끼고 아껴서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현대는 어떤 식일까. 거장의 영화에 투자를 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영화에 본인의 흔적을 단 하나라도 남기고 싶어서 '이건 이런식으로 가는게 어떨까'같은 훈수아닌 훈수를 두는 투자자들이 열에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감독이 원한 세상은 이런 것은 아니었을텐데,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강력한가보다. 만약 감독이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2024년에 살고 있는 거장이었으면 뭐라고 했을지가 궁금하다.
그냥 읽다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독으로서 만들고 싶은 영화
돈으로 꾸며놓는 화려한 작품은 만들기 어려워도, 단 두사람이 출연하고 오막살이 세트 하나라도, 실력만 있응면 사람의 가슴을 찔러줄 작품은 만들 수 있다. 이런 작품의 감독이 되고 싶다.
영화 시감 詩感
붓과 종이만으로 되는 문인들의 작품과 돈과 기계로 그리는 우리들의 일은 형편이 다르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진 최대 고통이다.
병인病人의 심중은 병인이라야 안다.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결심이, 혈맥을 매일 찌르는 주사의 힘으로 억지로 땅을 밟는 내가, 여윈 몸에 말소리까지 힘없는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부활한 신일선, 그리고 극계와 영화계의 이 일 저 일
시대는 나아갔다. 이제는 얼굴만 가지고 명배우 노릇할 때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예술적으로 가치 없는 작품은 군중에게 수요되지 않는다. 이제는 웃기는 영화, 웃기는 연극은 모두 버릴 때이다.
개화당 의 영화화
그렇다고 아니 하면 누가 해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조선 영화계에서만 볼수 있는 자살법自殺法을 응용해 가면서, 돈 많이 드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생략해 가면서, 표면에 나타난 세상이 다 아는 사건보다도 숨어 있는 이면사실을 중요하게 끌어내 보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누구나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은 약하기 때문에 졌다는 것이다. 힘이 모자라니 패하였다는 것이다.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 왜 해야 되느냐. 패하면 죽을줄 알면서 왜 싸워야 되느냐.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일족이 멸할 줄 번연히 알면서 왜 싸워야 하느냐. 일에 착수한 사람이나 참가한 사람이 옳은 일인 줄 알았기 때문이요, 옳은 일이니 자기들의 생명을 내놓고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이 성공만 했더 라면'이렇게 탄식만 하고 앉았지 말고, 왜 실패할 일을 하였느냐를 생각해 보자.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것만이 개화가 아니다. 역사란 언제든지 움직인다. 갑신년에만 개화당이 필요 하였던 것이 아니라, 세상은 아직도 컴컴하다.
그 시대에 필요하였다가 죽은 김옥균이를 다시 살리지 못할 터이니, 이 시대에 필요한 산 김옥균이를 많이 만들자
개화당 의 제작자로서
연결을 시켜놓으려니 사실 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되었으므로, 개화당이라고 붙일 용기조차 없어졌던 것이다.
아리랑 을 만들 때ㅡ조선 영화감독 고심담
영화가 문화사업의 하나라면 민중을 끌고 나가야 된다. 그러니 백 리 밖에서 아무리 기를 흔들어야 그 기가 민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언제나 우리는 민중보다 한 걸음 앞서서 기를 흔들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아리랑 과 사회와 나
'아리랑고개'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 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하는 일관한 정신을 거기 담자 한 것이나,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이외다.
현실을 망각한 영화 평자들에게 답함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원망만 말아라. 뉘 탓이냐. 다 네 탓이다. 그러니 네가 할 일이요, 네가 할 책임이다. 발 빠진 장님이 개천을 나무라는 것 같은 어리석은 짓은 말고, 네 할일은 네가 하라.
그 사람의 신분이 기생이라고 하자. 그러나 막이 열리고 무대에 나온 이상 한 사람의 배우다.
투쟁이 없는 곳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그렇다. 투쟁이 없으면 희망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먼저 투쟁의 필요를 느끼기 전에 투쟁의 상대를 알아라.
억지로 대중에게 무리한 호소를 한다고 대중이 군들의 억양抑揚에 맹종할 리 없는 줄 잘 알면서, 당장에 판단이 날 일을 악을 쓰고 떠드느냐 말이다. 모든 문제는 시일이 증명해 줄 것이다.
적어도 작품을 평하려거든 작품을 볼 만한 눈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 모든 사적인 감정을 떠난 양심 있는 붓을 들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를 간판으로 팔고 자가의 이익을 위하여 대중을 기만하려면, 그 생명이 얼마나 길 것인가를 잊어 서는 아니된다. 우리들에게는 실행이 있을 뿐이요, 군 등에게는 공론이 있을 뿐이다.
나의 러시아 방랑기
모든 동물은 방안에 기어드는데, 우리 세 사람은 죽음과 함께 경주하여 오는 어둠안에 우두커니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