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Lexington Ave, New York, NY 10174
한때 뉴욕의 거리가 좀 더 로맨틱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주황빛이 도는 낮은 색온도의 은은한 불빛이 거리는 물론 사람들마저 감싸안는 것처럼 보였다. 포근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뉴욕의 불빛은 서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뉴욕의 밤거리와 그 위를 수놓는 수많은 빛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비단 비슷한 색온도의 주황빛 조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아름다운 불빛 아래 거리를 걷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 당시 만났었던 여자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하루는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있다.
하루는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갈 때쯤 그녀는 내게 가장 좋아하는 건물이 무엇인지 물었다.
- 너는 뉴욕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물이 뭐야?
- 글쎄, 나는 아직 모르겠네. 맨날 바뀌는 것 같아. 너는 뭘 좋아하는데?
- 나는 크라이슬러 빌딩이 뉴욕에서 제일 예뻐 보여. 낮과 밤에 모두 아름답게 빛나잖아.
- 확실히 밤에 보면 제일 눈에 띄는 것 같아. 근데 저 건물이 왜 좋아?
- 그냥! 예쁘잖아!
뉴욕에 온 지 나보다 더 오래된 그는 종종 뉴욕을 산책하면서 보거나 인상 깊었던 건물에 대해서 얘기했었는데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 빌딩을 가장 예쁘다고 종종 말했었다. 예쁜 건물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듯 내게 얘기하던 그때의 모습이 이제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다. 낮에는 강렬한 태양빛을 반사시키고 굴절시키면서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밤이면 아름다운 아치 모양의 첨탑에 은은한 주황 불빛이 드리운다. 뉴욕에 온 사람들 중 크라이슬러 건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온 사람도 많지만 한 번 보고 나면 그 유려한 자태를 잊을 수 없다.
거의 100여 년 전인 1930년 완공된 이 건물은 말 그대로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의 회장이었던 월터 크라이슬러가 직접 자금을 대서 지은 건물이다. 특이하게도 회사 사무실 용도로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크라이슬러 자신과 가족을 위한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건물을 의뢰하였다. 크라이슬러 빌딩은 그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삼각형, 원형 등 반복되는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대로 건물에 적용시켜 디자인적 요소로 발전시켰고,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 등 그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재료를 활용하였다.
건물 외부에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디자인의 일부인 타이어 허브 캡, 펜더 등을 그대로 건물에 투영하기도 하였고, 가고일로 표현되는 라디에이터 그릴탑은 모양은 그대로 두고 스케일만 크게 변경하여 건물 모서리 코너에 배치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르데코 양식은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갔으며, 기차와 자동차 등 속도감 있는 산업 기계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공업화와 기계 미학을 건물에서 뚜렷하게 나타냈다.
크라이슬러 빌딩의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중 하나인 첨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아치가 점점 포개져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의 예리한 첨탑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밤이 되어 이 첨탑에 은은한 조명이 더해지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에 방점이 찍힌다. 첨탑은 1920년 맨해튼에 마천루의 높이 대결이 불붙었을 때에 생겨난 결과물로 우아한 자태에 가려진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다. 당시 크라이슬러 빌딩과 뱅크 오브 맨해튼 빌딩(현재는 40 월스트리트 빌딩)의 설계자인 윌리엄 반 앨런(William van Alen)과 크레이그 세버런스 (Craig Severance)는 맨해튼 스카이라인의 가장 높은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 중이었다. 두 사람은 원래 동업자였으나 이후 라이벌이 되어 비슷한 시기, 비슷한 높이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설계하였다.
초기 계획은 뱅크 오브 맨해튼 빌딩이 약 2피트 (60cm) 정도 더 높이 설계가 되어 있었지만 반 엘런은 경쟁자를 속이기 위해 약 43m 길이의 첨탑을 미리 제작하여 내부에 보관하고 있었다. 1929년 10월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크레인을 이용해 첨탑을 건물 꼭대기에 위치시키고 단 몇 시간 만에 조립을 완성하였다. 이로 인해 크라이슬러 빌딩은 최종 319m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고 뱅크 오브 맨해튼 빌딩은 그에 못 미치는 283m로 완공되었다. 그러나 약 11개월 뒤에 뉴욕 하면 떠오르는 건물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성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타이틀은 반납하게 되었다.
비록 가장 높은 건물도 아니고, 랜드마크라고 하기에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비해서 그 위세가 못 미치지만 나를 비롯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우아하고 기품 있는 건물로 크라이슬러 빌딩을 꼽는다. 아르데코 스타일 특유의 한껏 꾸며진 내 외관은 그 당시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해 주고, 시대를 반영한 디자인은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여러 기하학적인 요소는 빛과 결합되어 장식적인 요소를 보다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그림자를 통해 암부의 깊이를 더 드러낸다.
뉴욕의 밤거리를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크라이슬러 빌딩의 첨탑을 보면 그때의 그 여자친구가 스쳐 지나간다. 마치 개츠비가 데이지의 저택 부두 끝에서 홀로 초록빛을 내며 밝게 빛나는 등대를 바라보듯이 나에게 크라이슬러 빌딩 첨탑은 함께했던 그 시절의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등대의 초록빛과 첨탑의 은은한 주황빛을 보며 누군가는 아메리칸드림을, 다른 누군가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간절한 사랑을 생각할 것이다. 나에게는 닿을 듯 말 듯 하지만 결국 손에 닿지 않는 신기루와도 같은 그 시절의 모습이 이제는 어렴풋이 망막에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