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솜 작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흐름을 어떻게 감각하고 붙잡을지는 각자의 몫이다.
금속공예 작가 다솜은 ‘사라짐’과 ‘흔적’이라는 두 축을 붙잡아, 초와 촛대를 통해 시간의 모습을 시각화한다. 금속 위에 남겨진 결, 촛농이 흘러내리며 만든 형상,
그리고 반짝임 속에 드러나는 시간의 층위들.
이번 인터뷰에서는 다솜 작가가 바라보는 시간의 감각과
그가 금속 위에 남겨온 흔적들을 함께 따라가 본다.
0. 안녕하세요, 작가님. 간단한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
네. 저는 금속공예 작가 정다솜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겨지는 흔적들을 주제로 하여 촛대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1. 작가님의 작가노트나,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초로서 시간을 다루신다고 하시는 것을 볼 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시간에 대해 궁금해졌어요. 단순한 흐름을 넘어서, 작업 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감각되고 형상화되는지 궁금합니다.
시간이 사실 그냥 흐르는 거라고 볼 수도 있긴 한데요, 저는 순간순간 사라지는 것도 있고 쌓이는 것도 있고 그런 여러 가지 행태들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결과물로 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결과물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만든 촛대에서 초가 녹아내리면서 생기는 형태들로 작업이 좀 연장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촛대 작업으로 시간을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1-1. 시간은 쌓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거지만 초는 사라지기만 하는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요즘은 불 붙이면 기화되는 초가 많아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긴 한데, 저는 초 중에서도 기화되지 않고 녹아서 촛농이 흘러내리는 초들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흔적일 수 있고 사라짐일 수도 있는데, 두 개 중에는 더 어떤 게 더 초점을 잡고 작업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시간이 사라지면서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하거든요.
(두 가지 다 해당하네요)
네, 제 작업에서도 처음에는 일부러 기하도형에서 시작을 했어요. 그 이유는 기하학 형태에서 제가 깎아내는 결을 보면서 시간이 흐른걸 시각적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서 기하형태랑 깎아진 결 부분의 질감에도 차이를 뒀어요. 그것도 조금 러프한 질감으로 기하도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깎이고 마모되고 하다 보면 금속은 광이 나는데 그런 차이들을 표현하면서 작업을 진행했고, 그렇다 보니까 작업할 때도 다양한 순간이 있고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 쌓여서 결과물이 하나가 생겨나는 거니까 저는 두 가지가 다...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금속의 반짝임이 작가님의 시간의 흐름이자 흔적이 되겠네요.) 네, 그렇죠.
(기하 도형을 썼다는 말이 저한테는 되게 낯설어요)
사실 공예하시는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형태에서 본인의 세계를 표현하시는 분들도 많고, 그 형태들도 정말 다양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단순한 기하학 형태로 시작해서 깎아낸 결들로 인해서 생기는 저만의 형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직사각형이나 원기둥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를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2. 이런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혹시 어떻게 될까요?
작품을 만들기 전에 종이로 모델링을 먼저 하고, 기하학 형태의 모델링에 결들을 그려보고 모델링에서 비례를 설정해 줘요. 이때는 깎아낸 형태는 보이지 않고 그냥 정말 원형만 보고 어떻게 깎을지 생각만 하는 단계예요, 이후에는 방향이 두 가지예요. 왁스로 원본을 만들거나 목재 또는 골드폼이라는 소재를 깎아서 원본을 만들어요. 왁스로 제작할 때는 하드보드지나 3D프린팅으로 제작한 틀에 왁스를 녹여서 부어요. 그러고 나서 틀을 뜯어내면 이 왁스가 기하도형의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그 기하도형의 형태에 결 부분을 어떻게 깎을지 모델링을 보고 스케치를 해줘요. 그리고 조각도로 깎거나 아니면 불로 녹여서 작업을 진행을 해요. (엄청난 작업이네요...!)
3. 그렇다면 많은 사물들 속에서 초와 촛대라는 소재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시간을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시계도 있고, 시간이 멈춰 있는 거울이나 액자 같은 작업들이 있는데요. 저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제 작업에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떤 게 있을까 하다가 초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났어요. '시간이 흐르는 걸 표현하는 초가 있다면 나는 시간이 흘러 생겨난 흔적을 담은 촛대를 만들어 봐야겠다' 생각해서 그게 지금까지 쭉 이어지는 것 같아요. 아직까지 촛대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혹시 새로운 작업은 어떤 것들을 하시나요?)
금속공예 전공이다 보니까 전에는 가구 작업도 하고, 주얼리 작업도 하고, 금속으로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사물들을 만들어 본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요즘은 상품성 있는 사물을 만들고 싶어서 인센스 홀더를 만들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거울이라는 사물을 되게 좋아해요. 거울이 지금 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개체라고 생각을 해서 거울 작업을 해보려고 지금 구상하고 있어요.
(거울은 시간의 사라짐과 흔적을 나타내지 못할 것 같아요)
네, 그래서 그게 지금 가장 큰 고민이에요. 그래서 전에 화병 작업을 한 게 생각이 나더라고요. 화병은 보통 베이스 형태로 만들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것도 시간의 흐름이 조금 드러났으면 좋겠다 싶어서 다양한 시간이 공존하는 앞 뒤로 레이아웃이 다른 형태로 제작을 했었어요. 화병도 안쪽은 엄청 러프하게 되어있는데, 겉은 매끈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제가 안쪽에다가 내 시간을, 내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의 내면이랄까요. 그래서 이 화병 작업은 제가 조금 더 인간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4. 금속공예 작업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님만의 방식이 있나요?
제 작업은 공장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기법이에요. 망치로 하나하나 쳐서 기 올리고 이런 작업도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어떻게 보면 누군가는 그 방법이 더 시간의 흐름이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여러 개를 한 번에 제작할 수 있는 주조 기법을 선택했고, 보통 주조 기법은 모델링한 것 업체에 맡기고, 업체에서 주조해 주시면, 그것을 다듬는 것만 제가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연마하는 부분에서는 온전히 내 힘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4-1. 작업을 하실 때는 어떤 감정을 느끼시면서 작업하시나요?
처음에는 디자인하고, 모델링하고, 원본 나오기 전까지는 엄청 계산을 많이 해야 하거든요. 이런 부분을 표현하고 싶은데 이걸 어떻게 해야 주조로 나올 수 있을까에 대해 계산하는 시간을 먼저 가지는 편인 것 같아요. 그렇게 초반 디자인, 모델링 작업을 하고, 모래 주물을 하거나 정밀 주조를 하고 나면 금속으로 원본이 나와요. 그때부터는 소음은 엄청 시끄러운데 제가 유일하게 멍 때리듯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에요. 사실 저는 엄청나게 꼼꼼하거나 칼 같은 성격은 아닌데 작업을 하다 보면 흠집 하나도 더 잘 보이고... 깎아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손으로 사포질을 하고 있으면 잡념도 사라지고 그래요 [웃음].
(약간 명상상태에 다다르시는 것이군요) 네, 네.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가는 것도 잘 모르고 몰입해서 작업하는 것 같아요
4-2. 명상하실 때 어떤 장면을 상상하게 되시나요?
저는 작업할 때 그라인더나 핸드피스 같은 기계 소음 속에서 작업을 하게 되니까 헤드셋을 끼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놔요. 그래서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거나 하는 건 없는 것 같고,, 음악 들으면서 사포질 같은 반복 작업만 하게 돼요.
5. 초랑 촛대를 활용해서 작품을 만들고 계시잖아요. 사실 작품에 초랑 촛대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이라는 요소는 작가님에게 어떤 상징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저는 불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보진 않았었어요. 그런데 이번 질문을 받고 생각을 해보니까, 사실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흘러가는데 초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녹진 않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불은 제 작업 안에서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흐르는 게 보이는 초가 순간들이 되고, 마지막에 다 흘러내렸을 때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흔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일반적으로 불을 해석하는 것과는 달라서 색다른 답이 된 것 같습니다.)
6. 혹시 작업하시던 것 중에 제일 기억에 남았던 작업이 있으신가요?
제가 작업하면서 제일 마음에 들게 작업한 작품들이에요. 이 작업들을 통해서 이제 내 형태를 표현하는 방식을 찾아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작업들마다 저만 알고 있는 디테일이 몇 가지 있는데요, 결을 깎아낸 원형 모서리에 각이 있는 부분들을 조금씩 깎아냈거든요, 그래서 흐르는 모양이 조금 더 잘 보일 수 있게요. 완벽한 기하도형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작업했어요. 뒷면에서 보면 완전한 기하도형인데 정면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는 작업이에요.
7. 작가로서 요즘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나 장면들이 있을까요?
작업 외적으로 책을 읽을 때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최근에는 시간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까 시간과 관련된 책이나 시집이나... 그런 것들을 좀 읽었어요. 마침 또다시 논문 쓸 때 읽었던 책들을 한 번씩 읽어봤거든요. 그래서 그때 읽었던 책 중에서 생각나는 게 있긴 해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아포리즘,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라는 책인데요. 저는 '의미 없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인생이 꼭 무엇인가를 증명해야만 하는가? 목표와 목적도 없이 헛되이 이루어지는 지속이, 인생을 마비시킨다고 떠드는 자들이 있다' 이 구절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사실 제 나이대에 직장을 안 다니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요. 결혼한 친구도 있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 친구들이 저를 봤을 때 제가 회사를 다니거나 결혼을 한 게 아니니까 사회적인 나이에서 해야 할 것들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 작가라는 직업으로는 정기적인 소득을 갖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문장을 보고 많은 위안을 얻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작업에서 그러한 시간들이 더 잘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내가 온전히 집중하고 매달리는 일은 작업이니까, 여기서 나를 잘 표현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서요.
7-1. 작가님만의 스트레스 분출구나 소확행 같은 일상이 있나요?
음악을 들으면서 걷거나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일상적인 영감들을 좋아해요. 사람들 구경하고 그런 것들? 그래서 필름카메라와 헤드셋을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다녀요. 사진을 찍을 때, 그때에만 딱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사진이 시간이 멈춰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필름카메라로 찍을 때는 스캔하기 전에 필름에 빛이 들어가게 되면 사진에 빛이 들어간 순간이 나오기도 하고 이런 부분들을 좋아해서 작업도 시간, 흔적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8. 작가님의 작업물을 보면서 독자들이 느꼈으면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저는 제 작업을 보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석사논문 마지막에 썼던 문장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데, '보는 이들로부터 명상과 휴식의 시간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라고 썼거든요. 근데 딱 이 문장이 제 작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분들도 제 작업 봤을 때 편안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솜 작가의 작업은 단순히 기능적 사물이 아닌, ‘시간과 흔적’을 담아내는 하나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녹아내린 촛농이나 깎아낸 결,혹은 러프하게 남겨진 표면은 모두 지나간 순간들의 기록이 된다.매끈한 금속 위에 남겨진 그 미세한 흔적들은사라진 시간을 되살려 보여주는 작은 증거이자 또 다른 시작점이다.그의 말처럼, 보는 이들이 작품 앞에서 잠시 숨 고르며 ‘명상과 휴식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어쩌면 그 순간, 우리는 잊고 있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