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상처가 아니라, 또 다른 언어다

영현 작가

by 케쓰


트라우마는 보통 피하고 싶은 단어로 여겨진다.


하지만 영현 작가의 작업 안에서 그 단어는 새로운 결을 얻는다.

몸을 매개로 쌓여온 감정과 기억, 케이팝 무대와 종교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장면들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 사회적 풍경으로 확장된다. 이 대화를 통해 ‘상처’를 마주하는 또 다른 가능성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숭고의 빛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0. 안녕하세요 작가님 :)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현재 집중하고 있는 작업의 키워드를 직접 정의해 주신다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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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착용하는 공간인 조각을 기반으로 다양한 매체를 다루며, 몸과 건축적 구조를 매개로 인 간이 겪는 트라우마와 숭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작가 김영현입니다. 현재 집중하는 작 업의 키워드를 직접 정의한다면 "케이팝, 트라우마, 숭고, 구조, 해체, 몸, 빛" 정도가 떠오릅니다. 특히 최근에는 종교적 이미지와 무대 연출이 제 조형적 언어와 맞닿아, 숭고의 경험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1. 작가님은 다양한 관계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적 경험을 주제로 작업하신다고 느꼈습니다. 트라우마를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트라우마는 저에게 개인적인 경험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기억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겪는 파괴적 경험들이 제 몸과 감각 안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제 목소리가 진실해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K-pop 무대(특히 태민의 공연)에서 종교적 이미지와 고통·부활의 서사가 극적으로 재현되는 것을 보며, 제 경험이 사회적·예술적 언어로 확장될 수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개인적인 사건들을 객관화하고 정리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트라우마는 단순히 상처가 아니라, 저에게 창작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2-1. 트라우마로 작업하다 보면, 어떤 특정한 감정에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작업 중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감정이나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 감정은 어떤 식으로 작업 안에 녹아들었나요?


가장 오래 머물렀던 감정은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였습니다. 사랑과 폭력, 의존과 거부가 동시에 얽히는 경험 속에서 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교차하는 지점을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 감정은 「망상」 시리즈 안에서 구체화되었는데, 가해자가 피해자의 감각을 흡수하며 동일시되는 과정을 바디 오너먼트와 퍼포먼스로 풀어냈습니다. 몸을 가두는 동시에 장식하는 장치들 은 그 양가적 감정을 시각화한 결과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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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특히 자주 참고하시거나 영향받은 이론가나 개념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는 가해자와의 위계 관계 속에서 생긴 공포를 상담 과정을 통해 객관화하면서, 트라우마적 기억을 정신분석학으로 해석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확장했습니다. 특히 스톡홀름 신드롬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감정이 전도되는 지점을 보여주기에, 제 작업에서 권력과 의존의 역학을 탐구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저에게 굉장히 상징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범죄 사건의 심리 현상이 아 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권력과 의존의 역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이 개념은 "왜 고통을 주는 대상을 떠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고, 그것은 결국 제 작업이 집요하게 다루는 트라우마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타자의 폭력이 단순히 외부가 아니라, 어느 순간 내면화되고 자기 일부가 되어 버리는 과정을 시 각적으로 풀어내려 했습니다.



4. 몸이라는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어떻게 다루고 계신가요? 바디 오너먼트 (몸에 착용하는 조형물) 작업에서는 특히 어떤 접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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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저에게 갇히는 네거티브적인 공간입니다. 몸을 장식하거나 억압하는 바디 오너먼트 작업에서는 단순히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구속, 변형, 노출, 은폐 같은 상반된 의미들을 동시에 드러내려 합니다.

저에게 몸은 위로의 장소이자, 타인에게 노출되는 전쟁터이며, 동시에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장입니다. 그래서 제 언어로 표현한다면, 몸은 "상처와 숭고가 가장 밀착된 무대이자 공간"입니다.



5. 작업을 통해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치유인지, 혹은 또 다른 상처인지 고민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작가님께 작업은 어떤 감정의 순환인지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작업은 1차적으로 문제를 객관화하고 치유하는 과정입니다. 다만 그 의미를 관객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이런 경험을 했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정도만 전달되면 충분합니다. 작업의 목적은 타인이 아니라 결국 제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6.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https://youtu.be/euHXRZFGFkI? feature=shared)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망상」 시리즈의 최종 퍼포먼스였던〈Untitled( )〉입니다. 퍼포머와 엔딩을 논의하면서 저의 현재 상태와 트라우마의 결말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결국 저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지워내기보다는 제 안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로 했고, 그 결말을 퍼포먼스 영상에서 표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했던 순간이라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7. 작가님의 작품을 즐기는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요?


제 작업을 접하는 이들이 ‘트라우마’라는 단어에서 멀리 도망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 경험이며,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지점이기도 합니다.


제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상처가 단순히 약함이 아니라, 우리를 서로 먼 곳에서 미약하게나마 연결시키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현 작가의 이야기는 ‘트라우마’가 단순한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창작과 치유, 그리고 연결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몸을 억압하면서도 해방하는 모순적 공간에서 태어나며, 상처와 숭고가 긴장하는 순간 속에서 새로운 무대를 열어간다.


상처는 단순한 약함이 아니라, 우리를 서로 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언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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