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스위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세중립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포화를 피해 갔다. 당시 네덜란드와 벨기에도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들 국가는 결국 일의 침공을 받고 국토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약에만 의지하는 중립국의 지위가 그만큼 취약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나라의 침공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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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여러 방법으로 노력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력과 세계 속에서의 조선의 입지는 그 어떤 나라에게서도 이목을 끌거나 아군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처참히 밟힌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중립국 선언을 슬픈 형상으로 상상해보면서 순간 조선의 눈물겨운 울부짖음이 문장을 타고 내 머릿속을 따라 들어와 은근히 거슬리는 듯 찔러댔다. 약소국, 약한 사람, 소수의 그룹의 약속은 침해받았을 때 저항하고 따져봐도 어물쩍 넘어가버리고 당해버리는 게 상호 간의 약속을 지키자는 합의 뒤에 진짜 합의라고 역사를 통해 말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스위스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달리 중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위스의 프랑이 기축통화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게 확실한 패가 있지 않으면 그 어떤 든든한 보장과 인으로 두 겹 세 겹 보증한 조약을 들고 있다 한들 지켜주지 못한다. 반대로 생각할 때 내가 확실한 한 방이 있으면 그것이 작고 크든 상관없이 약속을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약속, 선언, 합의가 되었다고 의지하고 방심하지 말고 다각도로 진짜 약속으로 만들 수 있는 한 방을 찾아내고 찾아내는 게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