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고대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서 출발해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발전시키는 것에 도달하는 이 과정은 순수한 지성이 걸어가는 통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중략) 그러나 이것만으로 15세기 유럽 하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물질적인 세계로의 거대한 변화를 다 이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 변화는 또 다른 토대를 필요로 한다. 언뜻 보기에 훨씬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활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확산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쇄술은 1445년에서 1448년 사이 마인츠에서 일하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창안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말이다. 인쇄술은 이미 고대에도 있었던 기술이며 기원전 1000년대의 중국인들도 사용하였다. 구텐베르크는 실제로는 활자를 발명한 것이다. 그것은 인쇄업자가 여러 가지 크기의 글자로 된 책들을 매우 빠르게 생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활자가 맨 처음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이야기여서 많은 책들이 그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과학 발전의 역사에서 활자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인쇄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새로운 지적 풍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78p)
우리나라의 특성인지 다른 나라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은 때때로 보이는 기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일례로 직지가 있다. 청주는 직지가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기록에 초점을 맞춰'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도시의 상징으로 여겨 브랜딩하고 있다. 도시의 브랜딩을 위해서 선택했기에 조금 결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항상 직지를 홍보할 때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탄생 시기'와 경쟁하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역할은 어디까지였는가 그리고 그 영향으로 어떻게 되었는가가 핵심이 아닐까?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가 고려의 과학기술과 문명을 꽃피우고 발전시키는 데까지 이어졌는가를 보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비해서 가져갈 수 있는 건 혹시 '최초, 먼저라는 기록' 한 줄뿐이 아닐까?
이런 잘못된 집착은 5G로도 이어진다. 우리나라가 김대중 대통령 시기에 인터넷망을 전국적으로 구축했던 것이 그 이후에 유수의 IT 기업을 발전시키게 한 근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어느 나라보다 먼저 구축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어떤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5G 대역 망 구축을 하는 데 있어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최초라는 타이틀에 급급했었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데 있어 보이는 타이틀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타이틀이라는 문자적인 사실 한 줄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그 영향력은 한 문장에 갇히지 않고 시대의 문맥을 좌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