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타심과 공감을 욕보인 그자의 모습은 오랫동안 사람에 대한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블랙박스가 거짓말을 고쳐주었듯, 시간이 지나 그 상처를 치유해준 것도 있었다. 우연히 만난 애덤 스미스의 말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타심은 건물의 장식품과 같다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사회가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정의는 건물의 기둥과 같은 거라서 그것이 없어지면 건물이 무너지듯 사회도 무너진다고. 아름다운 결론은 아니지만 블랙박스처럼 유용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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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본 김경일 교수님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죽기 직전 무엇을 후회하는가를 이야기하면서 결국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타인과 함께 살아감에서 가치를 얻는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살고 싶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잘 사는 게 무얼까?
캐나다나 호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과 더 나은 사회 시스템이다. 큰 재산을 일구길 원한다면 개발도상국이 더 기회가 클 수도 있다. 이런 점을 봐도 무너진 사회에서 혼자 잘 사는 건 좋은 삶에서 멀어질 수 있겠구나 싶다. 결국 함께 잘 살아야 가치가 있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비단 경제적인 요소뿐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문화 등이 같이 따라와야 한다.
검사내전에서 나오는 사연들을 읽으며 참 안타까운 점은 사기는 빈부의 격차를 배려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정한 사기꾼에게 장사가 없을 수 있겠지만 가난한 이들,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회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 등 시스템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어둠의 손길은 더 악착 같이 달라붙는다.
너무 안타깝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 더 이타심을 갖는다면 다 같이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왜 이타심은 항상 장식품이 되어야 할까. 가끔은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인가 싶으면서 남들보다 더 다부지고 세속적이어야 살아남지 않을까 하며 마음을 놔버릴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도 이런데 매일 대면하는 것들이 사기사건이나 사회 문제들이기에 남아 있는 이타심도 의심으로 바꾸는 게 직업병이 될 것 같은 판, 검사님들은 조금만 마음을 놔버리면 세속화되거나 세상은 정의가 없고 약육강식이라고 결정해버릴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어렵겠다.
그러나 환경도 인권도 경제도 문화도 세상이 엉망인 것 같아도 그럭저럭 돌아갔던 것은 어쩌면 어딨는지 잘 보이지 않아도 곳곳에서 정의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곰곰이 내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상상해보면 그 옆에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은 희망을 놓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았을 때임에는 틀림없겠으니 오늘도 다부지게 이타심이라는 장식품을 달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