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많이 갖고 있으면 전문가로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좀 더 자료를 많이 모으려고 교수님과 선배 몰래 책이나 자료를 밤새 복사했다. 자료를 복사하고 나면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자료와 정보를 빛의 속도로 얻을 수 있다. 심지어 걸어가면서도 찾을 수 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장점인 시대는 지났다. 남들이 쉽게 찾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단단한 지혜의 칼이 필요한 시대다.
생텍쥐페리(Saint Exupery, 1900~1944)가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라고 했듯이 단순함이 세상에서 차별화되는 시대다.
요즘 다시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대세다. 디자인 분야는 물론이고 생활방식에서도 심플하고 단순하게 살기 위해서 ‘불필요한 물건 버리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정보의 홍수, 넘쳐나는 물건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 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어에서 '최소한도의, 최소의, 극미의'라는 뜻의 '미니멀(minimal)'과 '주의'라는 뜻의 '이즘(ism)'을 결합한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현실과 작품과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진정한 현실감이 달성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회화와 조각 등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해 기하학적인 뼈대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의 미술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 1870~1933)는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건축디자인에서 필요 없는 장식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처럼 디자이너는 본질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단순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단순함이란 간단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복잡성을 정리하여 서열을 정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 자신의 존재를 만들기 위한 극한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제품 디자인으로 유명한 일본 무인양품(無印良品)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디자인 목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이다. 즉, 무인양품 디자인 목표는 ‘잘 제어된 선택’을 통해 단순함을 성취하는 디자인이다.
디자이너는 어떻게 단순함을 만들어 갈까? 로고 디자인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ondon Symphony Orchestra) 로고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머리글자인 LSO를 단순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지휘자가 양손으로 지휘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로고를 디자인한 영국 디자인회사 더 파트너스(The Partners)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시몬 래틀(Simon Rattle)의 지휘하는 모습을 ‘모션 캡쳐(motion capture)’ 방식을 이용해 초당 120프레임의 비디오 데이터화했다. 이것을 분석하고 단순화해 오케스트라 머리글자인 LSO와 연결시켰다.
언 듯 보기에는 디자이너의 번득이는 영감으로 순식간에 만들어 낸 것 같지만, 그 과정은 길고 힘든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한 디자인을 보면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지만, 디자이너의 단순화를 위한 과정을 안다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디자이너가 일반 기업 관리자와 함께 일하면 힘들어한다. 기업 관리자는 자꾸 무언가를 더 집어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백만 보이면 이것저것 넣어달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디자인은 동네 슈퍼 전단지가 되고, 색동저고리가 된다.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Karim Rashid, 1960~)는 2017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기업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을 27번 오가면서 한국 기업들이 색다르고 파격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한국인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진보적인 편입니다. 삼성이나 LG만 봐도 기술적으로 앞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디자인만큼은 보수적입니다. 한국 기업과 일했지만 결국 시장에 못 나온 제품도 있습니다. 그들은 개성이 없고 뻔한 디자인을 찾았어요. 안타까웠습니다. 조금 더 도전적일 필요가 있어요."
디자이너가 제안하는 디자인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디자인은 완성도 높은 완벽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이야기한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