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무계획으로 떠나는 여행도 좋죠
동행하는 어른은 없지만 부산 역에서 친구들 중에 한 녀석의 할아버지가 픽업을 온다고 하셨고, 부산에 있는 동안 그 할아버지 댁에서 숙식을 할 거라고 했으니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된 셈이죠. 중3이라고 해도 다들 키가 벌써 180쯤 되니 도리어 혈기를 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마도 딸이라면 절대 보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음? 그렇게 생각하면 아들에게 조금 미안하게 되는 건가요? 일단 첫째 녀석은 그래도 믿음직한 면이 있고 약간 현실적인 사고방식이라서 걱정이 심하게 되지는 않아요. 그런데 자기만 조심해서 될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도 조심해야 하니 신경이 조금 쓰이긴 하네요.
제가 부모님 없이 동생과 처음 여행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네요. 저는 고2 여름에 중3 동생 녀석과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무전여행처럼 도착지를 결정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나 봐요.
일단 버스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당시 생각으로는 서울에서 그냥 쭉 아래로 내려오면 최남단이 그곳이었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장소는 완도. 무언가를 얻기보다는 그냥 부모님 없이 어디론가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떠났던 거 같습니다. 확실히 어렸죠.
완도에 도착했지만, 어디를 가겠다 결정한 것도 아니어서 그냥 터미널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 여기 바닷가잖아? 그럼 당연히 배를 타봐야지! 결정하고 무작정 항구로 버스를 다시 타고 나갔습니다. 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환상의 섬 제주도로 가는 배편도 있네? 가보자!
당시는 1991년이었습니다. 네, 당시 저는 아직 제주도에 가보지 못했죠. 비록 부모님의 신혼 여행지였다는 사진은 몇 개 남아 있었지만요. 그래서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도착하게 된 제주도! 제주항에 도착해서 어딜 가야 하나 잠시 생각했습니다.
음, 제주도에 왔으면 한번구경오십셔~ 로 외우고 있는 1950m(실제는 1947m네요)에 달하는 한라산에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동생과 같이 무작정 한라산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등산하고 내려왔지요. 당연히 백록담까지 올라갈 체력과 장비는 없었습니다.
시간 계획도 없이 그냥 배에서 내려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한라산에 도착해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던 거니까요. 어둑해지려는 순간에 다시 돌아 내려와서 산 어귀에 민박집에 들어갔습니다. 예약? 그런 거 할 줄 모르죠. 다행히도 휴가시즌은 아니었던지라 방에 동생과 잘 수 있었습니다.
무작정 서울에서 여행을 해보려 내려왔다고 하니 주인아주머니께서 조금 신박하다는 눈치를 주셨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렇게 잠을 자고, 올라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 보자, 결심해서 제주 공항에 갔습니다. 그런데 웬일? 경찰 아저씨가 잡더니 미성년자만 있어서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거예요.
서울 집전화까지 알려주고 엄마와 통화를 해서 가출 청소년이 아닌 건 알겠지만, 규정이 그렇다나? 아니 그럼 어떻게 집에 가냐고! 결국 제주항으로 돌아갔지만 그때 시간에 남는 자리는 부산항에 가는 자리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산을 처음으로 가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부산항에서 서울로 기차 타고 올라갈 때 결국 차비가 부족해서 주변 어른께 빌리고, 나중에 우편으로 돈을 보내 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아직 온정이 남아있던 시대였기에 그랬나? 완전 상식이 없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오래전 일이라 약간 미화가 되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었고, 지도도 책으로 들고 다니던 것 밖에 없었기에 어쩌면 정말 무식한 여행을 계획도 없이 다녀왔던 기억입니다. 울 아들은 아이폰 들고 다니니 처음 부산에 갔어도 갈 곳은 다 정해서 돌아다니겠죠? 부산이 고향인 친구도 한 명 있으니 좋겠네~
오늘의 결론: 무작정 무계획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도 좋은 사람과 떠나면 괜찮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그러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