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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은마흔여덟 Jan 02. 2025

딴엔 고군분투(4)

가족 - 핑계 김에 산책

[핑계라고 하면 괜스레 구실을 내세우는 것으로 치부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삶의 중요한 힘이 되기도 한다. 삶의 어떤 것들은 진실을 직면하는 것보다 때론 구실을 대며 외면할 때 더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정덕현


심경 때문인지 흐린 날씨 때문인지 대부도로 향하는 내내 어두웠다.

내가 밥을 먹었는데 무엇을 먹었는지 모르면 건망증이고, 밥을 먹은 사실을 잊어버리면 치매라는 전문가의 말처럼, 부친은 이제 먹었던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신다. 혼자서는 외출이 어려운 지경이 되어서 이젠 모친도 집에서 부친의 수발을 드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시도 때도 없이 한탄하시는 부친의 깊은 한숨을 매일같이 들어주며, 한평생 일만 하고 재미없게 산 부친의 유일한 동무가 된 모친은 그나마도 가끔씩 가던 교회마저 나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으리라는 짐작은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김장을 담근 뒤 그 피로가 사실로 증명되듯 대상포진으로 나타났다. "이젠 딱쟁이가 져서 다 나아간다"는 모친의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와 함께, 사는 게 다 이런 거라는 체념도 포함되어 있는 듯싶다.


기술과 서비스가 좋아진 탓인지, 10년도 넘은 차량의 부품을 교체해 준다니 놀라운 일이다. 처음 받아보는 리콜에 어색해하면서 예약된 시간에 차량을 입고했다. 공짜 부품 교환도 감사한 일인데, 분에 넘치는 설명과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신속한 서비스에 한 번 더 놀랐다. ‘이래서 기아 타이거즈가 통합 우승을 한 것인가?’ 맥락 없이 중얼거리며 서비스 설문 조사에 "아주 좋음"으로 응답해 주었다.


어제 리콜 서비스가 일찍 끝나면 부모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을 계획을 세웠었다. 부친이 많이 걷지 못하는 탓에 집에만 계셔서, "너희들 차를 타고 어딘가 나가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모친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었다. 효도라고 할 만한 일들을 하고 살지 않았고, 그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도록 살겠다는 생각이었기에 매번 "알아서 하겠다"는 말로 무심함을 정당화해 왔었다. 뇌경색 판정을 받던 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개똥철학이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눌렀고, 진지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차량 수리를 핑계로 시간이 남아서 "점심을 먹으러 가자"라고 전화를 걸었고, 모친은 기다렸다는 듯 그러자고 했다.


처음부터 대부도를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최근에는 덕평휴게소를 주로 갔었다. 먹거리도 풍부하고 잘 만들어진 휴게소 주변 공원은 부친의 산책로로는 최적의 장소다. 그런데 오늘은 바다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예전에 갔던 기억도 다시 상기시킬 겸 시화달전망대를 구경하고, 인근에서 칼국수를 먹고 산책을 하다가 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부친을 모시러 갔다. 은행 볼일이 있다는 말에 경로를 약간 수정했지만, 시간상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과묵한 집안의 식사 시간 마냥 침묵의 시간을 내비게이션과 함께하며 대부도 인근까지 니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 오면 칼국수와 파전이지. 날씨도 날 돕는구나!


무료로 막걸리를 제공해 준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칼국숫집. 바지락 칼국수 두 개와 파전을 시키고 나서 "막걸리 한잔 드릴까요?"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무척 드시고 싶어 하시는 모습에 괜히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뇌에는 술이 담배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일단 안 먹는 것으로 하고, ‘다음 진료 때 가끔 막걸리 한잔은 어떻게 안 되겠냐고 의사에게 졸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다고 "아무거나 먹자"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상상 속 막걸리와 함께한 과묵한 식사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바지락 하나, 오징어 한 조각 남길 없이 깨끗하게 말이다.


달빛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찬바람만큼이나 썰렁했다. ‘사람이 없어서 장사를 안 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할 무렵, T층에 도착해서 열린 문 사이로 자리도 없이 빼곡한 손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었는데, 밖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모두 연인들과 어르신들이 차지, 카운터 옆 두 개의 테이블 마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다행히 하나의 테이블에 바로 자리가 생겨 부모님을 앉게 해 드릴 수 있었다. 따뜻한 라테 세 잔을 받아 설탕을 타고 호호 불어 드시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달콤해졌다. 식당이나 휴게소에서 늘 자판기 커피만 드시는 부모님이다. 실제로 맛이 있어서인지, 그 맛에 길들여져서 맛있다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혹독한 맛을 본 후 알게 되었다. 부모들의 입맛과 취향은 가격 때문에 의도치 않게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격을 모르시는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시는지, 6천 원짜리 라테를 달콤하게 드시며 "맛있다"라고 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내내 어두웠던 마음이 달콤한 백색 설탕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전망대는 아까 내리던 비가 함박눈이 되어 통창 유리 너머 세상을 온통 하얀색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주말도 없이 일을 나가셨던 목수의 몸은 이젠 간신히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두 해 전만 해도 나이 먹으니 지하철도 공짜라면서 혼자 지하철을 타고 온양온천에 다니시던 부친은 이제 방향을 잘 모르겠다고 지하철도 이용하지 않으신다. 이 정도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조금만 더 좋아지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경조사 때나 들르곤 했었다. 시간이 많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이 참에, 부친을 살펴보겠다는 핑계 삼아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도, 잘 가지 않던 산책을 부모님을 모시고 간다는 것도 그간 죄송한 마음을 용서받고자 함은 아닐까. 핑계 김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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