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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냉장고와 장독대 사이

- 기술은 도구일 뿐

by 케빈은마흔여덟

[사실 내 모든 결정과 행동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바로 나를 잃지 않는 것. 다수에게 옳다고 해서 내게 맞는 것은 아니며 삶의 문제가 언제나 한 가지 결론으로 도달하는 건 아니기에 나는 이랬다 저랬다 간을 보며 최적의 나를 찾는다. 때론 빠르고 때론 느리게, 때론 뜨겁고 때론 차갑게, 인생은 모순 투성이니까, 인생을 사는 나도 그래도 된다]

- 하지 않는 삶/ 히조


“떡볶이나 해 먹자.”

“떡 어디 있어?”

“기다려봐, 내가 찾아줄게.”


우리 집에서 자주 오가는 대화다. 냉장고 속에서 식재료를 찾는 일은 대개 아내의 몫이다. 그녀 말로는 “넣은 사람이 찾아야지.” 내가 떡 하나 제대로 못 찾으니, 자연스레 냉장고 정리는 그녀의 영역이 되었다. 때로는 정리 안된 냉장고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같기도 하다.


하지만 빈틈없이 꽉 채워진 냉동고를 열 때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유통기한이 두 해를 넘긴 명란젓, 얼어붙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꺼낼 때면 말이다. 냉장고는 식재료를 오래 보관하게 해주는 훌륭한 발명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덕분에 우리는 신선한 재료를 제때 즐길 기회를 오히려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역설은 냉장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은 분명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감각과 능력을 조금씩 무디게 만들고 있다.


스마트폰 덕분에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가 사라졌고, 그 결과 지금은 가족 번호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딘가에 번호를 적으려다 멈칫한 적,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길은 잘 찾지만, 도착할 때까지는 늘 초행길 같고, 목적지에 도착해도 주변은 여전히 낯설다. 편해졌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AI의 등장은 더 충격적이다. 이제는 사진, 영상, 글쓰기까지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 완성된다. 나도 글을 쓰면서 AI를 접했는데, 종종 말문이 막힐 정도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창작조차 기계가 흉내 내는 시대.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말이 그리 과장이 아니다.


기술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음식을 잘 보관했다. 장독대에서 꺼낸 된장 속에는 계절의 맛과 시간이 담겨 있었다. “이건 지난여름이 들어 있어”라는 종갓집 할머니의 말처럼, 음식에는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냉장고 덕에 우리는 풍족해졌지만, 계절감이나 추억은 사라져 버린 것 같기도 하다.


기술이 우리에게 묻는다.

“더 편리해졌으니, 행복해졌나요?”


정재승 박사는 한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휴대폰 덕분에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노래방 기기 덕분에 가사를 기억할 필요도 없지만, 대신 우리는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탐색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암기력은 줄었지만, 우리의 뇌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단순히 기억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필요할 때 정보를 ‘어디서 찾을지’를 아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한 뇌신경의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의 신경이 차단되면 우리 몸은 다른 경로를 찾는다. 기능을 대신하거나, 아예 새로운 능력이 발달하기도 한다. 시각 장애인이 청각에 더 민감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퇴보를 뜻하지는 않는다. 뇌는 쉬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작동 중일 수도 있다. 단지 방향이 달라졌을 뿐, 멈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다.

기술이 무언가를 가져다주었다면, 동시에 무언가를 앗아간 것도 사실이다.


과거 사진기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 그림을 업으로 삼던 이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묘사를 위한 그림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은 오히려 더 주목받았다.

이동수단이 발달해도, 인간은 여전히 ‘더 빠르게, 더 높이’를 꿈꾼다. 기술은 방향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의 본질적 욕망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나는 인간의 능력보다도, 인간다움이 위협받는 것이 더 걱정이다.

기술은 점점 더 많은 걸 대신해주고 있지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나 감성, 느림의 미학 같은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소변기를 전시장에 전시하며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를 해석한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는 내가 정한다.” 기술과 인간, 예술의 경계를 되묻는 도발이었다.


이제는 우리도 그런 질문을 해야 할 때다. 기술의 진보 속에서 인간성은 누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기술은 분명 우리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편리함에만 안주하다 보면, 인간의 본질적인 감각과 태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기술을 도구로 삼되 삶의 주도권은 스스로 쥐는 일이다.

냉장고는 떡을 신선하게 보관해 줄 수 있지만, 그 떡으로 따뜻한 한 끼를 나누는 건 우리 몫이다. 기술이 삶을 돕는 순간은 많아졌지만, 삶의 ‘맛’을 만들어내는 건 여전히 인간이다.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더듬는 사람에게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인지도 모른다.


#딴엔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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