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3) '제주도'가 아니라 '휴식'이었어

-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by 케빈은마흔여덟

[인생의 한때 삶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없었다. 그냥 남들이 사는 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조차 멍청한 대답을 하거나 가장 무난해 보이는 남의 생각과 말을 따랐다. 나의 정체성은 앵무새였다.]

- 뜻밖의 좋은 일/ 정혜윤


수시로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 삶을 돌아보게 하는 문장이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요즘 나는 잔잔하고 따뜻한 이야기에 끌린다. 스펙터클, 서스펜스, 휘몰아치는, 이런 영화보다는 조용히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즐긴다. 안 그래도 잘 놀라고 소심한 나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이제 불편하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이런 뜨뜻미지근한 영화를 왜 보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취향은 강요할 수 없는 법. 반전도 없고 긴장감도 없지만, 로맨틱 코미디가 요즘 내 취향을 정통으로 저격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맥라이언과 통행크스 주연의《유브 갓 메일》이다.

이 영화는 인터넷 초창기의 감수성을 담고 있는데, 언제 보아도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편지가 온라인 공간으로 들어가고 개인 PC가 보급되며 디지털 시대가 막 열리던 무렵. 지금 기준으론 아날로그나 다름없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내 또래에겐 충분히 그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주인공들이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너무 달지 않은 달고나처럼 은근히 달콤하다.


그 밖에도 좋아한 이유가 많지만,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특히 마음에 남는다. 주인공 조(톰 행크스)가 여자친구랑 이웃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장면이다.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추자 불안함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서로 묻는다.


"지금 당장 엘리베이터를 나가면 뭘 하고 싶나요?"


이건 우리가 살아가며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질문이다. 지금 당장의 욕구를 묻는 말일 수도 있고,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생각이 많아질수록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도 노래에 실어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그의 노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그 나이를 퍼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이거 아니면 끝장,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게 뭐냐는 문장만 계속 반복되는 노래. 흘려들으면 다소 격한 표현 같기도 하고, 다그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지식도 깊이도 없던 시절 의미도 모른 채 처음 듣고는 “이딴 노래가 다 있냐”며 비웃었다. 웃기고 자빠졌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배우고 어른이 되어가며, 그 반복적인 질문이 삶 전체를 꿰뚫는 대단한 물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구차한 변명은 제쳐두고, 이제는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묻게 된다.

어릴 적 "꿈이 뭐야?"라는 질문을 받으면 《굿 윌 헌팅》의 윌처럼 엉뚱한 대답을 하곤 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을 말하거나, 성적에 맞춰 미래를 정했다. 그 과정에서 내 꿈은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사회에 나와서는 바쁜 일상에 치여, 꿈이 뭔지도 잊고 산지도 오래다 그런 나에게 신해철의 노래는 잊고 있던 질문을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직장 생활이 힘들 때면 "제주도로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지금도 추운 겨울이면 어릴 적 동화 속 따뜻한 남쪽나라를 떠올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원했던 건 '제주도'가 아니라 그저 '휴식'이었다. 바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제주도라는 상징으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질문의 진짜 대답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였다.

어른이 된 나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한 듯 늘 엉뚱한 대답으로 얼버무렸고, 그 말에 발이 묶여 원하지 않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 일쑤였다. 못나 보이지 않으려고, 더 있어 보이려고 애쓰며 진지해지기까지 40년이 넘게 걸렸다. 초등학생한테나 할 법한 질문 같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오히려 답하는 걸 주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최근, 거의 처음으로 진짜 원하는 걸 하나 찾았다. 작가가 되고 싶다.

책을 읽으며 위로받았던 순간들이 나를 바꿨다. 몇 개의 문장, 몇 개의 단어, 몇 개의 글자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아픈 이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매료시켰다. 책 몇 권 읽고, 글 몇 편 썼다고 작가라는 꿈을 꾸는 게 섣불러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흔들렸고, 그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나도 쓰고 싶어졌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유명한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가 유명해지는 게 더 어렵다'라는 말도 있다. 글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가족이 있는 나로서는 '돈보다 꿈'이라는 말이 이상적으로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줏대 없이 사라져 간 꿈들과 상처받은 어린 나를 위해, 지금은 소심한 고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꿈이라는 것이 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흔들리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꿈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신해철의 노래처럼 삶의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 짧은 질문 하나만 잘 붙들어도 삶은 훨씬 쉬워진다.


#고군분투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 냉장고와 장독대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