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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책은 나를 다시 쓰게 했다

- 읽은 만큼 살아진다

by 케빈은마흔여덟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힘이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삶을 따라 관객은 그의 입장에서 삶을 바라보고, 그의 입장에서 세상의 가치를 가르는 경험을 한다.]

- 읽기의 발견/ 정비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은 독서하는 습관이다.”

– 빌 게이츠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부터,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효과가 운동이 신체에 미치는 효과와 같다는 철학자들의 말까지, 책의 가치를 강조하는 명언들은 수없이 들어왔지만 정작 나는 책을 멀리했다. 시간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독서를 뒤로 미뤘다. 취미로 독서를 하면 쉬는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일하는 기분이 들었다. 먹고사는 게 바빠 독서는 사치라고 여겼고, 목마르지 않으니 책에 대한 갈증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독서는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꾼 경험이었다. 책이 건넨 손길은 따뜻했다. 우울증의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출발점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집어 든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펼친 책이 내게 길을 내주었다.


책 속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삶을 통해 "사람 사는 게 이럴 수도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위로라는 커다란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어떤 책은 내 아픔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었고, 어떤 책은 나보다 앞서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며, 나도 언젠가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나는 서서히 치료되고 있었다.


내가 걸은 만큼이 내 인생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누가 더 많은 경험을 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경험한 만큼이 나의 자산이 되고, 그 자산이 내 삶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더 많은 경험과 더 깊은 경험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지만, 경험의 크기가 삶의 척도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죽음을 앞둔 순간, 우리가 떠올릴 것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언젠가 했던 일과 먹었던 음식, 좋았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 같은 경험들일 것이다.


직접 경험하는 것은 즉각적인 반응을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이다. 경험은 감각적이고 입체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준다. 한 번 겪은 일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긴장하지 않고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이유도 경험 덕분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시간과 돈은 한정적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일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간을 쓰다 보면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책은 그 한계를 허물어준다.


우리의 뇌는 현실과 상상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상만으로도 실제 경험과 비슷한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을 통해 직접 겪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볼 수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 살아보지 않은 시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는 담겨 있다. 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그 경험은 독자를 성장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린아이는 동화를 읽으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여행서는 낯선 문화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역사책은 과거의 흔적을 느끼게 하고, 철학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렇게 간접 경험을 통해 우리는 시야를 넓히고, 세상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큰돈 들이지 않고도 무한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이보다 더 뛰어난 가성비의 도구가 또 있을까?


책을 고르는 시간도 독서만큼 중요하다.

책을 읽는 시간만큼이나, 어떤 책을 읽을지 고르는 시간도 중요하다. 모든 책이 내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내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책은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쁜 책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편향적이라면 읽지 않으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이다.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읽고 싶지 않다면 소용이 없다. 억지로 읽으면 독이 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책을 고르는 과정에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무작정 책을 고르는 대신, 서점과 도서관에서 한 권 한 권 직접 책을 살펴보는 과정이 내게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어떤 주제가 나를 사로잡는가?" 그렇게 책을 고르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마치 경험의 한 칸을 채우는 것과 같다. 책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생각을 배운다. 그 경험은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독서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내면을 성찰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더 깊이 사고하고,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들의 선택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단단해진다.


독서는 이제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고, 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도구다. 책은 나에게 끝없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한때 나는 회사와 집만 오가며, TV나 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트루먼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도서관을 찾았고, 책과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내 인생도 장편소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책은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고, 내가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나은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경험한 만큼이 곧 내 인생이라는 것을. 독서도 간접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간접 경험을 선사할 내 책도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기대해 본다.


#딴엔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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