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을 깨는 연습
[인생에는 누구나 전성기가 있다. 한 번쯤은 능력을 인정받을 때가 있다. 대부분 그 성공에 도취하여 남은 인생이 계속 그럴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 내려갈 길을 살펴야 하듯이 인생의 전성기는 원하는 만큼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이의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쉰을 향해 가고 있다. 공자는 마흔을 불혹(不惑), 쉰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불혹은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 지천명은 하늘의 뜻을 깨닫는 나이. 하지만 나의 마흔은 온갖 일에 휘둘리며 흘러갔고, 쉰을 바라보는 지금도 하늘의 뜻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정말 쉰이 되면 뭔가 깨닫게 될까? 사십 대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결국 별다른 변화 없이 지나와버렸다. 나는 아직도 막연하고, 삶의 답을 찾기 어려운 지점에 서 있다. 그래도 공자님 말씀인데, 일개 백수인 나로선 한 번쯤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혹시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을 지도.
또 한 번의 명절 연휴가 끝나간다. 출근할 일도 없는데 마음은 어딘가 심란하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뾰족한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난 청소년기를 함께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들이 위로가 된다.
자주 꺼내 읽는 건 ‘H2’와 ‘러프’다. 특히 ‘러프’는 수십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결말까지 외우다시피 했지만, 매번 멈춰 서게 되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친구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는 특별한 말 없이, 부모님이 자신에 대해 했던 말을 인용해 고백한다.
“부모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구석은 일절 없어. 뭘 해도 적당히 크게 다치지도, 큰 실수도 안 해.
전혀 손이 가질 않아서 눈을 떼도 안심하고 있을 수 있지.”
매번 이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멈추는 이유는 저 말이 꼭 나를 설명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사고 한번 제대로 친 적 없고, 크게 다쳐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없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은 곧 진리라 믿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해결하려 애썼다. 문제라도 생기면 "넌 안 그럴 줄 알았어", 실수라도 하면 "너까지 왜 그러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착하고, 무난하고, 말 잘 듣는 사람’으로 규정되었고, 나도 그 틀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착해야 한다’는 기준은 내 기분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늘 양보했고,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게 당연했다. ‘말 잘 듣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순응을 강요했고, 어려움이 생겨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았다. 그 틀은 결국 내 시야를 가뒀고, 선택의 폭을 좁혔다.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도 빈번했다.
세상엔 ‘당연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만든 틀 속에 갇혀서 스스로에게는 늘 당연한 선택을 강요했다. 먹는 취향 같은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업무 협상까지, 그 틀은 나를 조종했다. 그리고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며 나를 속였다.
‘프레임’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관점, 해석의 틀. 미디어나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갇히면 우리의 시야도 좁아진다. 생각해 보면, 내 안의 ‘착해야 한다’는 기준도 일종의 프레임이었다. 남이 씌워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지켜온 프레임. 그래서 더 강력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빠, 사실 나 돈가스 안 좋아해.”
죽기 직전이거나 벼랑 끝에서야 비로소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 예전엔 이해되지 않았던 장면들이 이제는 가슴에 와닿는다. 나 역시 계속 이 틀에 갇혀 있다 보면, 언젠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사실 나, 착하고 싶지 않았어”라고 고백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에 대한 규정을 다시 살펴보려 한다. 정말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그렇게 믿어온 것인지. 그리고 그 믿음을 바꾸기 위한 연습을 시작한다.
프레임을 깨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 경우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우울증이 그 틀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아프고 나니 벼랑 끝에 선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힘들어서 그만둘래요"
‘착하다’는 이미지, ‘말 잘 듣는다’, '알아서 할 거야'는 이미지가 깨지고 무너지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이젠 주변에 손을 내밀어보려 한다. 혼자 끙끙대는 것만으론 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괜히 부리는 고집이 보인다. 좋으면서도 싫다고 하거나, 싫으면서도 괜히 좋다고 하는 모습. 어릴 적 나도 그랬기에, 아이의 거짓말이 들린다. 딸아이는 소시지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건강에 안 좋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대찌개에 들어간 소시지를 허겁지겁 먹는 걸 보면, 진짜로 싫은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싫다며, 왜 먹어?”라고 딸에게 이렇게 따져 묻지 않는다.
그렇게 묻는 순간, 자존심에 상처라도 받으면 딸은 더 완고하게 ‘난 원래 소시지를 싫어해’라는 프레임을 만들지 모른다. 나는 오히려 그 프레임이 단단해지기 전에,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려 한다.
딸이 언젠가 “소시지가 맛있긴 한데, 건강 생각해서 적당히 먹으려고.”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몰래 먹는 대신,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를. 어쩌면 그 작은 한마디가, 자신만의 프레임을 깨는 시작이 될 것이다.
나 역시 지금도 나만의 프레임을 깨려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반평생 굳어버린 틀을 과연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을 다 해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남이 만든 규정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스스로 만든 틀이라는 것을 안다. 그 틀에 불편함을 느꼈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 그 틀을 깨는 법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고군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