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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겨울이 싫어서 여름

-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그래도 나가본다

by 케빈은마흔여덟

['감성이 죽었을 때 인간은 늙은 것이라고' 나는 늘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사람에 대해, 시대에 대해, 늘 그때그때 아파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새로움 앞에서 또다시 설렐 수 있는 것. 나는 이것이 정녕 살아 있는 것들의 특권이라고 확신한다.]

- 내일 일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 윤용인


기온 영하 10도, 체감 온도 영하 20도. 최근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기록할 거라는 일기예보를 들은 다음 날 아침, 이불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팔 하나만 내밀어도 찬 기운이 스며들어 금세 다시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게 된다. 완전히 몸을 일으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름은 더워서 싫지만, 겨울은 추워서 더 힘들다.


이런 사소한 결정에까지 이렇게 망설이다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점점 늙고 점점 더 구차 해질 테니, 그냥 본능적으로 죽을까 봐 추위를 피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해 본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질문이 폭발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말끝마다 “왜?”가 붙는 시기. 가끔은 “아빠는 왜 눈이 작아?” 같은 허를 찌르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당황스럽지만, 세상만사가 신기하기만 한 아이의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런 질문에 성의 있게 답하는 일, 그게 아빠의 소소한 책임이라 생각한다. 물론 아주 가끔은 지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오늘처럼 유난히 추운 날 아침,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우, 너무 추워서 나가기가 싫다.”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여름하고 겨울 중에 어느 계절이 더 좋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름을 싫어했다. 자외선 알레르기 때문에 햇볕 아래 오래 서 있으면 밤새 긁어야 했고, 예민한 후각은 여름의 불쾌한 냄새를 더 민감하게 느꼈다. 벌레도 싫고, 모기는 한 마리라도 있으면 잠을 못 잤다. 무엇보다 추울 때는 입으면 되지만, 더울 때는 아무리 벗어도 견디기 어렵다는 점이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도 겨울이 더 싫다. 어릴 적 들었던 어른들의 말, “눈 오면 차 막히고 길 미끄러운데 뭐가 좋냐”는 투덜거림이 이제는 내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허리가 아프고, 감기와 독감은 번갈아 찾아온다. 해를 넘기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되었다. 외갓집 아랫목에서 군고구마를 먹던 따뜻한 기억도 이제는 아득해졌고, 겨울을 좋아하게 했던 이유들은 하나씩 사라져 갔다. 나도 제비처럼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중얼거린다.


“여차저차 그래서 겨울이 더 싫어.”


그런데 말하고 나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질문은 분명 “어느 계절이 더 좋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정작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도 말하지 않고, 그저 ‘덜 싫은 것’을 골라 답하고 있었다.


손실회피편향(loss aversion bias) 또는 손실회피성향이라고 불리는 심리적 경향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은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 역시 점점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손실을 피하려는 마음이 새로운 이득을 얻으려는 욕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 선택은 욕구나 열정보다는, 회피와 방어에 가까워졌다.

그런 선택은 익숙하고 안전한 길로 나를 이끈다. 하지만 동시에 가능성과 기회를 제한하기도 한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궁금증이 밀려와 급히 AI에게 물었다.

“손실회피편향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뭐야?”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손실에 민감해 투자나 건강관리, 인간관계에도 소극적이 될 수 있고, 이는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고, 해법은 용기와 지혜로 삶의 가치를 찾는 것.’

무책임하게 자기 얘기 아니라고 쉽게 말하네. 툴툴거리며 넘겼지만, 곱씹을수록 그 말이 틀리진 않았다.


더 나쁜 것을 피하려는 선택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선조들이 위험을 피해 살아남았듯, 이것은 어쩌면 진화 과정에서 얻어진 본능적인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생사가 오가는 선택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이 ‘두려움’이 아니라 ‘열망’이기를 나는 바란다.

뜨뜻미지근했던 반평생 삶, 남은 생도 손해만 피하면서 살 수는 없다. 가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끓는 열정으로 인한 선택을 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선택의 순간, 종종 한 박자 쉬면서 묻곤 한다.

‘무엇을 피하려고 이 선택을 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바라는 걸 선택한 것인지’


적어도 아이의 순수한 질문 앞에서는 더 이상 도망자 같은 답을 하고 싶지 않다.

"겨울이 더 싫어서 여름을 선택했다"는 말 대신

“겨울의 설경도 멋지지만, 나는 푸르른 자연을 즐기고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는 여름이 더 좋아.”

“그래서 아빠는 옛날엔 겨울이 더 좋았는데, 지금은 여름을 더 좋아해.”


이제 나는 두려움보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며 살겠다는 작은 다짐을 담아본다.


#딴엔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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