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한 밤, 계엄 그리고 우리 안의 폭력
2023년 12월 3일,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책에서나 보던 '계엄'이라는 단어가 조용하던 밤을 공포로 물들였다. 군이 헬기를 타고 국회에 진입했고, 경찰은 국회를 봉쇄했다. 이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러 차례 전쟁을 유도하고 소요 사태를 조장하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평화롭던 나라가 전쟁터가 될 뻔했다. 소극적인 군과 용감한 시민 덕에 계엄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그날 밤은 충격과 두려움으로 각인됐다.
하지만 그날 이후에도 폭력은 계속됐다. 계엄을 지지한다는 일부 집단이 폭력을 조장하고, 시위대는 사법부 건물을 부수고 경찰을 폭행했으며, 방화를 시도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계엄을 선포한 전직 대통령은 법의 기술로 구속에서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일부 군인들이 구속되긴 했지만, 누가 어디까지 내란에 가담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폭력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진행형이다.
뉴스를 보면, 층간소음으로 살인이 벌어지고, 홧김에 불을 지르며, "욱해서"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줄을 잇는다. 총기 소지가 금지된 나라에서 이 정도이니, 총기가 허용된 나라의 현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총기 난사 사건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폭력이 옳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왜 폭력은 멈추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설명은, 폭력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고, 그 본능은 현대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통제가 풀려 폭력이 터져 나온다. 약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폭력을 선택하는 것도 결국 생존 본능의 연장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은 폭력을 통해 유지되곤 했다. 이 땅에서도 전쟁을 겪었고, 수차례 계엄이 선포됐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쟁과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폭력은 유전적 수준에서 인류에게 내장된 속성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친척 형, 거칠고 불량한 친구들과 선배들, 군대에서의 ‘군기’라는 이름의 폭력까지. 인권 개념이 희미했던 시절, 선생님의 체벌도 “맞을 짓을 했으니까”라는 말로 쉽게 정당화됐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폭력 속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나는 폭력을 증오한다. 유전이나 환경이 곧 폭력을 낳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인식에 있다.
사람은 각자의 욕망을 품고 살고, 그 욕망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생존 본능이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건 사회의 몫이다. 갈등은 모두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전부 폭력으로 치달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우리 머릿속에 내재된 말, 바로 "맞을 짓을 했다"는 사고방식이다.
군대에서 처음 들은 말 중 하나가 ‘구타유발자’였다. 살상 무기를 다루는 조직에 일정한 기강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군기는 종종 명분에 불과했다. 폭력은 그 명분 아래 묵인됐다. 타 부대에서 폭력을 고발한 병사가 전출 왔을 때, 그는 피해자임에도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결국 그는 격리되듯 떠나야 했고, 가해자는 남았다.
어릴 적 선생님들은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때리며 '사랑의 매'라고 말했다. 성적과 상관없이, 체벌은 ‘맞을 짓’이라는 말로 쉽게 포장됐다.
요즘은 교사의 체벌은 줄었지만, 학교폭력은 여전하다. 어떤 학교는 일이 커질까 봐 쉬쉬하고, 어떤 가해자는 권력이나 재력으로 사건을 축소시킨다. 과거엔 ‘맞을 짓을 했다’는 말로, 지금은 ‘힘이 있으면 괜찮다’는 인식으로 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이 말은 그 자체로 섬뜩하다. 성공하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끊어야 할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계엄을 지지한다는 사람들도 “야당의 폭주”, “그럴만했다”, “정부 인사 줄탄핵” 등을 이유로 폭력을 두둔하고, 언론은 그런 입장을 ‘다양한 시각’이라며 보도한다.
어느새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고에 길들여지고 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타협으로 희미해지고 있다. ‘폭력 유발자’, ‘맞을 짓’ 같은 말들은 범죄를 덮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리 잡았고, 결국 그것이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
이제는 폭력이 발생하면 그 이유부터 따진다. 처벌 이전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사회. 폭력의 무게보다 ‘맞을 만했는지’의 기준을 들이미는 사회. 결국 갈등의 끝에서 ‘때려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 셈이다.
갈등은 어디에나 있다. 정치, 사회, 회사, 가정 등 갈등은 숨기거나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나는 갈등은 해결을 위한 시작점일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다르다. 반드시 단죄되어야 한다.
폭력도 괜찮다는 인식은, 폭력은 처벌된다는 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유전적 본능은 바꿀 수 없지만 우리는 억제할 수 있다. 아주 작은 배려, 아주 사소한 이해, “조심할게요”라는 말 한마디, “괜찮아요”라는 반응 하나가 때로는 폭력을 막는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사회 전체의 인식에서 시작된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 문장이 상식이 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맞을 짓’이라는 말부터 없애는 데 있지 않을까.
#딴엔고군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