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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보안보다 더 피곤한 마음 인증 시대

- 진짜 나를 기억하기

by 케빈은마흔여덟

[우리는 남의 삶을 저울질해 감정의 순도를 감별하는 판관이 아니다. 타인의 삶은 내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며 우리 또한 관객이 아니다]

-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이승한

보안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요즘은 인증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2003년, 내가 처음 금융회사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보안 개념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다.


그땐 금융기관이라고 하면 은행만 떠올렸다. 입사하고 나서야 증권사, 저축은행, 캐피탈 등도 모두 금융기관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다닌 곳은 대부업을 포함한 여신 전문 금융회사였고, ‘금융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름의 위엄이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겉모습은 근엄했지만, 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금융업에서 실수는 곧 돈과 직결된다. 제조업에서는 실수가 제품 불량으로 이어지지만, 금융에서는 한 번의 실수로 거액이 엉뚱한 계좌로 송금되거나, 전혀 다른 사람의 신용정보가 조회되기도 한다. 나 역시 동명이인의 계좌로 3,500만 원을 잘못 송금해 진땀을 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고객 인증이 지금처럼 철저하지 않았다. 자동차 금융을 담당하며 하루에도 수십 건씩, 회사 전체로는 수백 건의 신용조회를 했다. 그런데 주민등록번호 하나만 알면 누구의 신용정보든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래처에서 틀린 번호를 보내오면 엉뚱한 사람의 정보가 조회됐지만, “번호나 제대로 줘요” 한마디로 넘어가곤 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보안은 강화됐고, 개인정보 보호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지금은 신용조회를 하려 해도 다단계 보안 절차를 거쳐야 하고, 실수로 잘못 조회라도 하면 벌점이 부과된다. 대출을 받거나 통장을 개설할 때도 인증 단계를 몇 번씩 거쳐야 한다.


이제 금융권뿐 아니라 우리 일상 곳곳에 인증이 자리 잡았다. 무엇을 가입하든, 신청하든, 수정하든 ‘그냥 되는 일’은 없다. 비밀번호는 복잡해졌고, 한 번 틀리기라도 하면 전산이 막혀 하루를 통째로 허비하는 일도 벌어진다.


“당신임을 증명하세요.”

“네, 저 맞습니다.”

“확실합니까? 진짜 당신 맞나요?”

“정말 진짜 저 맞다니까요!”


우리는 오늘도 끊임없이 ‘진짜 나’ 임을 증명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인증에 시달리고 있다. 보안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행복한 나’를 보여주기 위한 인증이다.


SNS에는 수많은 인증 사진이 올라온다. 맛집, 여행지, 쇼핑, 운동… 우리는 순간을 기록하고 공유한다. 하지만 어느새 ‘진짜 나’보다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더 신경 쓰게 된다. 좋은 모습만 골라 보여주고, 행복한 장면을 강조하며, 때로는 약간의 과장도 곁들인다.


그러다 보면 문득 헷갈린다.

내가 진짜 좋아서 하는 일인가?

아니면 좋아 보이기 위해서 하는 건가?


맛있지도 않은 음식을 남들이 맛있다기에 먹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소유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명한 명소를 찾아가 억지 미소를 짓는다. 비교는 비교를 낳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억지 인증을 한다.


보이기 싫은 건 감추고, 행복해 보이는 순간만 남긴다.


정말 좋아하는 걸 하는 것.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 이 모든 것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인증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남기기 위한 인증이면 좋겠다. 진짜 행복을 놓치면서까지 인증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좋아 보이는 것과 진짜 좋은 것은 다르다.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인증 속에 살아간다. 보안 인증에 지쳐가듯, ‘행복한 나’를 인증하느라 마음도 지쳐간다. 그러나 내 진짜 가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리고 내가 정말 행복한 순간도, 나만이 제대로 기억할 수 있다.


행복해 보이려 애쓰다가, 정작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잊어버리지 않기를.

비밀번호처럼 꼭 기억해야 할 건,

진짜 나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인증해야 할 가치일지 모른다.


#딴엔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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