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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머릿속이 하얘질 때

딴엔 고군분투 - 재능

by 케빈은마흔여덟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게다가 변하지 않는 것이 꼭 옳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음이 아집과 관성, 무기력의 증거이기도 하다]

-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글을 쓰다가 막히면 머릿속이 하얘질 때가 있다. 정리되지 않은 문장과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을 때면, 한순간 온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도 그랬다. 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는데, 정말로 온 세상이 하얘졌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봄의 시작, 느닷없는 함박눈이 세상을 덮었다. 꽁꽁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울 준비를 하던 산과 들, 길가의 꽃들이 하얀 눈 아래에서 숨을 고른다. 따뜻한 봄을 기다리던 내 마음도 잠시 멈춰 섰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 이른 것일까. 온기를 기대하던 몸과 마음에 다시 한기가 스며든다. 아내의 피곤한 몸짓이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생활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다며 시작한 아내의 아르바이트는 그녀의 손과 다리, 그리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은 듯하다.


손에 물도 묻히지 않게 하겠다는 내 약간 과장된 약속에도, 아내는 묵묵히 나를 믿고 함께 걸어주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일을 나가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나는 무겁고도 고마운 책임을 느낀다.


나는 조금이나마 미안함을 덜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손을 덜어주기 위해 집안일을 하고 있다. 설거지, 청소, 아이의 공부를 챙기다 보니, 그간 당연하게 여겼던 집안일이 실은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걸 깨달았다.


쓸고 닦은 뒤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이, 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질러진다. 굴러다니는 먼지와 머리카락, 쌓인 설거지거리,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몸을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청결한 바닥, 깨끗한 식기, 정리된 집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 어머니, 그리고 지금의 아내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딸, 오늘 청소기 돌렸으니까 과자 먹을 때 조심해."

"책 읽고 나면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엔트로피 법칙처럼, 완벽하게 정리된 집은 단 하나의 경우일 뿐, 대부분의 경우 집은 다시 흐트러진다.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모든 것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집, 그리고 세상에는 당연한 것은 거의 없다.


엊그제 유튜브에서 한 정치인의 연설 장면을 봤다. 계엄 이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정국 속에서, 그는 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건넸다. 그중 소탈했던 이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땡’을 잡은 줄 알았는데 ‘꽝’인 경우가 있고, ‘꽝’인 줄 알았는데 ‘땡’을 잡는 경우가 있다."


당연하다 여길 때, 아닌 경우가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말이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나마 계속 읽고 쓰면서 아주 가끔 부끄럽지 않은 글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법 괜찮다고 여긴 글을 쓴 뒤에는, 다음 글이 한층 더 어려워졌다. 더 잘 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무한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글이 산으로 가곤 했다.


그렇게 막힐 때마다, 나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재능의 사전적 의미가 의외다.

재능(才能):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해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

오십 년 가까이 살면서, 오늘 처음 알았다. 당연히 행운처럼 타고나는 것만이 재능인 줄 알았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얻은 능력도 재능이라면, 나도 재능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 것은, 이제 나도 재능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

불행인 것은, 이제 재능이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욕망도 있고, 시간도 많다. 그렇다면 앞으로 안 되는 것은 결국 내 노력 탓일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해졌다.


재능은 타고나는 행운만이 아니다. 내가 배우고 연습하고 노력한 것들도 모두 재능이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무수히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가는 시간 사이, 쓰고 싶다는 욕망은 나를 한 발 한 발 나아가게 만든다.

어쩌면 함박눈처럼 쌓이는 나의 연습도, 언젠가 따뜻한 봄의 꽃을 피울 것이다.


눈 덮인 세상은 찰나의 여유를 준다. 하얗게 비워진 새 문서 위에서, 나는 다시 채울 준비를 한다.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리고, 감사하지 않았던 것들에 마음을 돌려본다.


역시, 세상에는 당연한 것은 없다.


얼마 전, 혹시나 업계의 근황을 묻고 싶어서 후배에게 연락을 했었다. 하지만 시국도 어수선하고, 인사 발령 때문에 바쁘다는 말을 듣고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님, 잘 지내시죠? 요 몇 주간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 드렸네요.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은 어떠세요?”


뜬금없는 눈발에 잠시 ‘아직도 겨울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곧 봄이 올 거라고 믿는다.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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