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21
나는 체질적으로 잇몸도 치아도 꽤나 건강한 편이다. 아니, 이제는 과거형으로 얘기해야겠지. 건강한 편이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늘 멀쩡했고, 스케일링이란 걸 까먹고 지내도 별문제 없이 지나갔다. 나에겐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아직도 나는 젊고 무언가 무너지는 시점은 한참 멀었다는 신호처럼. 치간칫솔 같은 건 텔레비전 속 다른 세대의 이야기였고, 내 삶에는 등장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어딘가 찝찝한 이물감이 입안에 남았다. 혀끝으로 밀어도 빠지지 않는 잔여물들. 거울을 들어 이 사이를 들여다봤을 때, 처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잇몸선을 보게 되었다. 미세하게 주저앉은 선. 등 뒤를 지나가던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치간칫솔 써야 해. 너도 나이 들어가는 거야."
늘 젊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이 내 몫이 될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과거완료형과 현재진행형 안에서 표류 중인 관계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함께할 줄 알았던 순간들이 이제 와서는 그저 한 시절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나는 누구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며 서로의 자유를 지켜주는 일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되묻게 된다. 정말로 나는 소유하지 않았던 걸까. 나만의 방식으로, 나도 모르게. 꽤 집요하게 사람들을 내 안에 묶어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소유하지 않겠다'는 말조차 소유의 또 다른 방식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순간을 산다.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영원을 꿈꾼다. 어떤 감정은 오래가길 바라면서 시작되고, 어떤 관계는 끝날 수 없을 것처럼 붙들리며 지속된다. 그건 어쩌면 생물학적인 본능을 넘어서 존재의 구조 자체가 품고 있는 방향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가페적이며 신적인 무한한 사랑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눈앞의 사람에게 더 자주 기대게 된다. 그 이유를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 ‘보임’ 일 것이다. 무소부재한 절대자는 보이지 않지만 찰나에 불과한 사람은 눈에 보인다. 손에 잡히고, 말에 반응하고, 울고 웃으며 내 앞에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은 끝내 사람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그 온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사랑을 추측하려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순이 생긴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그를 품고 싶어진다. 그의 시간을, 마음을, 시선을, 가능하면 그의 삶의 일부까지.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든 것은 결국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사랑한다. 흘러갈 줄 알면서, 언젠가 손에서 빠져나갈 걸 알면서, 다시 품는다. 그런 순환을 반복하며 우리는 조금씩 자라난다.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흔적처럼 남아 있고, 또 누군가 역시 내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런 관계적 흔적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조용히 소유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꼭 억압이거나 굴레일 필요는 없다. 서로를 얽매지 않으면서도,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한 사람의 삶 안에 기꺼이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완전한 자유만을 이상화하려 하는 건 얼마나 철없는 혈기였던가. 사랑에는 무게가 있고 그 무게는 흔적을 남긴다. 중요한 건 그 무게를 서로에게 어떻게 남기느냐다. 구속이 아닌 기억으로, 강요가 아닌 여운으로. 서로를 기쁘게 소유하지 않고도 아끼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게 된다. 서로 소유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 존재이자 동시에 소유하고 싶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끝까지 다정할 수 있도록.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그 사라짐조차 존중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