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4
올 초봄, 나는 탱자 3,000주를 지인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일종의 선물이랄까. 유선상으로 연락받았을 땐 3,000이라는 숫자가 전혀 실감이 안 갔다. 그냥 생각보다 조금 많겠거니 했다. 그런데 박스를 열고 나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상상 이상으로 빼곡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맨손으로 시작한 일은 생각보다 꽤나 고되었다. 퇴비도 직접 뿌리고 비닐멀칭도 손으로 꾹꾹 눌러 다졌다. 물을 줄 땐 이랑 하나하나에 손가락을 넣어 흙의 습도를 체크했고, 바람이 불면 비닐 위로 떠오른 온도를 손바닥으로 느꼈다. 처음엔 기분이 괜찮았다. 손끝이 까슬해졌을 때도 별생각 없었다.
그날 밤, 연습 도중에 손가락이 부르트며 가려워짐을 처음 느꼈다. 아침이 되어도 나아질 기미가 없이 점점 악화되었기에 아홉 시가 되자마자 피부과에 갔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받았고, 의사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손을 너무 많이 쓰셨나 봐요. 그 말이 왜 그리 민망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난 지금, 가려움은 없어졌지만 손끝은 아직 조금은 낯설다. 예전 같으면 이쯤 되면 다 나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무언가가 내 손끝에 남아 있다. 피부에 생긴 변화가 아니라 손에 새겨진 습관. 맨손으로 흙을 만지지 않고, 물기를 오래 두지 않고, 연고를 바르고 그대로 눕는 일이 익숙해졌다. 처음부터 장갑을 꼈다면 이러진 않았겠지만 주의력이 높은 나였다면 이만큼 기억에 남지도 않았겠지.
탱자는 대목이다. 열매를 바라보고 키우는 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열매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다른 품종을 붙이는 나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목적이 다르다.
삶의 모퉁이에서 이따금씩 만나는 어떤 관계들도 그렇다. 함께 무언가를 맺기 위한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자라는 것만으로 의미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요즘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떠올린다. 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꾸며내지 않은 그 사람의 온도대로 곁에 있고 싶은 관계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살아 있고, 옆에 있다는 걸 느끼는 관계.
스무 살 즈음에는 그걸 몰랐다. 가까이 가는 게 좋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온도차가 나면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시가 있으면 조심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찔리면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아프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몇 번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까 그제사 뜨거운 불 앞에 손을 오래 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그걸 연륜이라고 부른다면, 나도 이제 감히 그 나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완전히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 옆에선 예전처럼 마음이 간다.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선을 넘고, 선을 넘지 않으려다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가 덜 다치는 쪽을 선택할 줄 아는 정도가 생긴 것 같다.
탱자를 돌보면서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이 있다. 이 묘목들은 그냥 이 자리에 뿌리내리는 게 목적일 수도 있겠구나. 지금은 쓸모가 없어 보여도 나중에 누군가 접을 붙이고 물을 주고 햇빛을 받으면 또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게 보면 나는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탱자와 같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계절이 있다.
습진은 언젠가 완전리 사라지고, 손끝에 남은 쪼글쪼글함도 곧 흐려질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내게 남은 건 그보다 더 오래갈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손에 밴 흙냄새, 낮은 자세로 땅을 바라보던 눈높이,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기억.
향기로 남는다는 건 그런 것 같다. 향수처럼 굳이 뿌리는 게 아니라 손끝에 자연스레 배어드는 것. 문득 떠오르면 웃을 수 있는 정도의, 그런 흔적.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_ 어떤 흔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