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09
두려움은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택을 미루기 위한 완벽한 핑계다. 내가 알지 못한 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자리 잡고, 언젠가 해야 할 결정 앞에서 '지금은 아니야'라는 속삭임을 정당화시킨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주는 일도 그랬다. 미루고, 재고, 다시 들여다보다가 결국 가장 좋지 않은 순간에 쏟아붓게 되는 것. 그 안에는 언제나 이유 모를 불안이 섞여 있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누군가에게 표현한다 해도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게 효율적으로 순환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처음에는 꼭 누군가의 반응이 아니라도 상황의 변화나 어떤 흐름이라도 반응으로 돌아오길 기대했지만, 대개는 정적이었다. 내가 꺼낸 말, 건넨 손길, 조심스럽게 내민 마음들이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 마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감정이라는 것이 회수 가능한 자산 따위가 아니라는 걸 서른 넘어서야 깨달았다. 미련하기도 하지. 쓰면 줄고, 줄어든 채로 남는다. 되돌려 받는다고 해도 그건 내가 준 것과는 다른 성질을 띤다. 그쯤 되자 실망의 방향도 바뀌었다. 사람에게 실망하기보다는, 기대하던 내 태도에 지치게 됐다. 결국 남는 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썼는지에 대한 기록뿐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감정을 나눈 그 순간의 온도와 표정을 '기록'하는 쪽으로. 돌려받지 못한 감정은 소모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 빈자리에 어떤 반응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빈자리가 내 안에 만들어준 새로운 결을 들여다보게 됐다.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의 무늬가 문득 일상 속에 비치고, 그 순간을 기록한 내가 나를 더 오래 알아보게 되는 과정. 이것만큼은 '익숙해져도 좋을 기분 좋은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감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감정은 들어오고 빠져나간다. 다만 흘러가는 것에 대해 덜 초조해지는 만큼 조바심이 덜 난다. 그렇게 다 쓰고 남은 감정의 궤적을, 나는 요즘 내 삶의 결로 삼고 있다. 어떤 날은 신병 휴가 나가던 날 아버지 군번이 다려준 군복 주름처럼, 어떤 날은 반지하 방에 벽지 뒤로 배어 나온 물자국처럼, 그리 선명하진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누군가와의 기억 속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내가 보낸 마음들을 조용히 정리하고, 필요하다면 꺼내어 다시 읽고, 그렇게 나를 조금 더 알아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감정을 소비하는 동시에 또다시 나누는 이 순환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줄이고 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더 깊게 품고 있는 나를 알아가게 된다.
한때는 그 모든 감정의 소모가 허무하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다. 돌려받지 못한 마음들, 허공에 머물다 흩어진 손길들이 그저 낭비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_ 그래, 하지만. 지금에서야 안다. 그 모든 감정은 그 순간마다 진심이었고, 진심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를 향해 내어 준 마음은 결국 나를 만드는 조각이 되어 지금의 나를 더 단단하고 깊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그러니 그 모든 소모는 이제, 나에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