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소리에 대한 윤리

250506

by 케비놀로지

윤리는 언제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를 마주하고 그 마주침이 생겨날 때 비로소 윤리는 형성된다. 소리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 파동은 물리적인 사실이며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사람과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단순한 파동은 관계가 되고 관계는 곧 책임을 부여한다. 그래서 나는 소리에 대해 고민할 때,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 닿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뮤지션으로서 내가 다루는 소리는 언제나 공간을 전제로 한다. 공간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다. 그곳에는 이미 축적된 시간, 사람의 흔적, 기억의 결이 스며 있다. 나는 내 방 안에서 그것을 매일 느낀다. 책장에 눌어붙은 먼지, 손때 묻은 악보들, 피아노 건반 위에 내려앉은 지나온 길의 냄새.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쌓아온 시간의 층위다. 곧,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공간은 이미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말이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대한 윤리’에서 이야기했듯, 공간의 윤리성이란 그런 과거를 함부로 지우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기억들과 함께 호흡하는 태도이며, 그러한 윤리를 품고 있는 공간에 울려 퍼지는 소리 또한 자동으로 관계가 형성되며, 곧 윤리성이 부여된다.


나는 피아니스트로써는 꽤나 긴 시간 악기 자체를 거부했다.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는 꽤나 나약해져 있었으며, 건반 앞에 앉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러나 이 시골구석까지 찾아와 준 수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의 응원이 있어서일까_ 나는 언젠가부터 조심스레 피아노에 손을 얹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습이 아니었다. 이 방이 품고 있던 나의 과거와 현재가 다시 연결되는 과정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것도 미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전히 존재하는 이 방의 윤리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다시 파동을 피상적인 행위를 넘어 시작하는 일이었다.


건반을 눌렀을 때 느껴지는 역동은 마치 내 방의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스며드는 감각. 나는 그 무형의 촉감을 따라 소리와 공간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갔다. 내가 치는 한 음 한 음이 이 방 안에 남겨질 때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나 연습이 아니라 이 공간과 새롭게 맺는 약속이 되어야 했다. 내가 치는 소리는 이 방의 축적된 시간들과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나를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소리의 윤리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 공간 안에서 다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파동으로 선언하는 일이 되어야 했다.


새로 쓰기 시작한 곡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 곡을 쓰면서 ‘어떤 감정을 표현할까’보다, ‘이 파동이 누군가를 어떻게 살아내게 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내가 조립해 가는 음이 모여 화성이 되어가고, 그 하나하나의 조각이 타인의 삶에 어떤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소리를 던질 때마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따뜻한 빛의 조각처럼 누군가의 깜깜한 마음속을 조심스레 두드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짧게 정의 내린 결론은, 소리의 윤리란 무언가를 억지로 전달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다만 조심스럽게 존재함에 의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파동이 타인의 공간을 지배하지 않기를_ 다만, 조용히 그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


나는 소리를 낼 때마다 스스로 묻는다. 이 파동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이 울림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 내 소리가 누군가의 시간을 무너뜨리는 대신 스스로의 시간을 다시 살아내게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통과한 소리만이 진짜 소리가 되겠지. 모든 소리는 결국 살아 있는 공간을 통과하며 또 다른 존재와 맞닿는다. 그러므로 소리의 윤리란 단순한 기술이나 미학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다정한 책임'이다.


오늘도 나는 이 방에 스며든 기억들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는다. 건반에 손을 얹기 전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첫 음을 누른다. 그 소리가 이 방을,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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