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냥에 맞는 소리

250504

by 케비놀로지

기이한 일을 자주 마주하게 되는 요즘이다. 트랙이 너무 좋았는데 전부 AI였다거나, 읽고 감동이 되었던 글이 자동 생성된 문장들의 조합이었다거나. 누가 썼는지도 모르고 누가 연주했는지도 알 수 없는데 그 모든 것이 너무 정교하고 너무 자연스럽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고, 때로는 사람보다 더 예쁘다.


그럴 때마다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어딘가가 일그러진다. 마치 갓 학교에 입학했던 시절, 나무로 된 바닥에 못이 하나 툭 튀어나온 걸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감각. 요즘 난 건반 위에 손을 올릴 때마다 그 감각을 떠올린다. 만약 기계가 나보다 더 매끄럽게 연주할 수 있다면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대체 무엇이며, 아직도 난 의도하지 않은 소리를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이 검고 하얀 것들 위에 손을 올리는 걸까.


흐릿한 화성에 내성이 터지듯이 세게 울린다거나, 피아니시시모가 공허한 소리일 뿐인 날을 종종 만난다. 그런 순간마다 당황스럽고 때로는 스스로 미워진다. 그런데 그 기억들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잘한 연주는 희미해지고, 망쳤다고 생각했던 한 번의 보이싱은 몇 년이 지나도 선명하다. 아름다움은 정말 잘한 것에 있는 걸까, 아니면 끝까지 어긋난 감정을 붙들고 있던 몸짓 안에 있는 걸까.


모든 사람이 그렇기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지 않을까. 매일 똑같이 치지 못하고, 마음은 음악적 하이어라키와 상관없이 요동친다. '연습'은 그걸 통제하려는 반복되는 시도지만 '연주'는 오히려 그걸 허용하는 일이다. 허용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거지.


기계는, 또 AI는 이 모든 주사위놀이를 정리한다. 박자를 놓치지 않고, 강약을 계산하며, 감정선을 분석한다. 무엇이 감동을 주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정교하게 반복한다. 그래서 이상하게 쓸쓸하고, 너무 잘 짜여서 아무 데도 걸리지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감탄을 부르는 완벽함일까, 아니면 미묘하게 흔들리는 살아 있는 실루엣일까. 나는 자꾸 후자를 믿게 된다. 아무리 흐릿하고 느슨하더라도 그 안에서 단 한 번 진심이 지나가는 흔들림. 그 한 끗 차이.


소리와 소리 사이의 거리, 손끝이 닿는 깊이, 해머가 현을 때리는 미묘한 시간차. 사람은 그 불완전한 각자의 조건을 매일 감내한다. 감내한다는 건 곧 애쓴다는 뜻이며, 애쓴다는 건 실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종국에, 실패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으로 귀결된다.


나는 오늘도 하루만큼 조율이 엇나간 피아노 앞에 앉는다. 페달이 삐꺽대고 불완전한 음이 흩어진다. 눈을 감고 눌러보면 어김없이 손끝에 걸리는 그 소리. 완벽하지 않아서 더 기억에 남는, 딱 거기까지밖에 갈 수 없었던, 내 깜냥에 딱 맞는 소리.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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