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품을 구입하면 의례히 두꺼운 설명서가 따라오는 것이 당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휴대폰을 구입하면 휴대폰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기능 설명서가 따라왔었죠. 그리고 사람들은 당연히 제품 이용 전에 꼼꼼히 설명서를 읽어보고, 하나하나 기능을 익히면서 연습해야 했었죠. 그러던 시기에 설명서라고는 달랑 한 페이지짜리 종이 쪼가리를 넣어 주는 애플의 제품은 다른 제조업자들과 소위 전문가들로부터 “무성의하다”, ”불친절하다” 등 비난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소비자들에게는 사랑의 받았죠. 기존의 제조업자들, 전문가들의 견해와 달리 소비자들이 애플의 제품을 선택하고 애정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 하나의 이유를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디자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설명서가 필요 없는 디자인. 배우고 연습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기능의 최고치를 누릴 수 있는 디자인. 기존에 당연시 여겼던 준비과정을 없애 준 시간 가치를 제공한 디자인. 이것이야 말로 디자인의 발전 모습이고, 디자인과 기술 모두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입니다. 왜냐하면 기술도 디자인도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지난 20여 년 동안 기술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해왔고, 필연적으로 디자인 인력도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유형의 비주얼에 한정되어 있던 디자인의 영역은 무형의 서비스까지 확대되었고 디자인이 필요한 영역도 소비재 위주의 B2C에서 다양한 B2B의 산업들까지 늘어나게 되었죠. 디자인의 외적 성장은 놀랄만하게 커졌는데 왜 소비자로서 느끼는 요즘의 디자인에서는 종이 한 장만으로 초보 사용자를 당장에 능숙한 사용자로 만들어주었던 그 제품의 감동을 얻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인이 현장에 이뤄지지 않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디자인이 현장에서 이뤄진다는 의미는 디자이너가 사용자에 대해 충분히 공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디자인 프로세스가 사용자를 관찰 혹은 조사하고 여기에서 디자인의 힌트를 얻고 이를 발전시켜 디자인 결과물로 만들어는 과정을 거칩니다. 하지만 프로세스를 잘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죠. 많은 디자인 작업의 프로세스를 들여다보면 사용자와 공감하기 위한 노력의 비중보다 디자인의 품질을 높이는 일의 비중이 월등히 높습니다. 마치 사용자들 들여다보는 일은 요식행위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물론 디자이너들이 사용자들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노력이 네모난 스크린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 즉 현장이 아닌 인터넷 미디어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쉬운 것입니다. 사용자, 고객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처럼 행동하고 생각할 때 더 나은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현학적 디자이너들의 등장과 그들의 영향력 증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음양의 원리로 구분해 본다면, 디자인은 어느 쪽일까요?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양의 영역일까요? 아니면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음의 영역일까요? 저는 디자인은 음양의 영역 중간에 위치해서 밸런스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예술과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보는 것이죠. 과거의 디자인은 좀 더 음에 가까웠습니다. 디자이너의 직관과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중요했었죠. 그리고 이제는 음과 양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의 역할 이동에 이론과 체계는 필요한 요인이었고 이를 담당하는 디자이너들도 자연스럽게 등장했습니다. 대부분 대학원이나 해외 유학을 통해 학위를 받은 분들이죠. 학문적으로 단련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종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력이 좋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양의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기존의 디자이너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이죠. 양의 세계의 사람들에게 선택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디자인계의 특성상 논리와 체계로 무장한 이들의 소통력은 현대 디자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능력이고 강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 논리와 체계는 디자인이 가진 자율과 창의에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논리와 체계가 심화될수록 틀에 박히거나 정형화된 디자인이 나올 가능성이 크고, 사용자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그래서 특정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혜택과 가치를 제공하는 디자인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과거의 디자인 교육은 디자이너의 감각을 만들어주는 데 집중했다면 요즘의 디자인 교육은 수많은 프로세스와 템플릿, 그리고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게 하는 일에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밸런스를 만들어 주는 측면에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자격증, 학위, 지식, 논리에 매몰되면 정작 가장 중요한 소비자, 고객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의 제대로 된 이야기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사용자와 동떨어진 디자인은 만들게 하죠. 디자이너 스스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디자이너의 최대 목표인 사용자에게 더 나은 가치를 만들어주고 이를 통해 그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디자인은 사용자의 현장에서 그들과 공감하고, 사용자의 문제해결을 돕는 가치를 제공하고, 사용자들을 쉽고 빠르게 제품 사용에 능숙한 사용자로 만들어 주는 디자인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디자인의 친절함에 감동하고 애정을 갖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용자들이 선택하는 디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 #1> 혼자 생활하는 노인의 가정에서 발견한 장치입니다. 노인의 위급 상황시 버튼을 눌러 즉시 관계기관과 연결되는 기능을 가졌는데요.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노인이 작동법을 익히고 위급 상황시 동작하기가 과연 용이할지 많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왜 이런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요?
<사진 #2> 건널목을 건너고 계신 한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보행기를 짚고 길을 건너고 계신데요. 보행기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이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환경들이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어떤 점들이 더 보강되면 좋을까요?
<사진 #3> 서울의 한 번화가에 설치되어 있는 심폐소생술 체험기입니다. (실제 기기 아님) 한동안 지켜봤습니다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로 이곳에 설치되었을까요? 공공디자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있을까요?
+디자이너는 늘 사용자에게 배워야 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많은 사용자가 선택해야 좋은 디자인입니다.
+++친절한 디자인은 늘 사용자가 선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