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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Apr 23. 2022

사는 곳, 만나는 사람, 하는 일을 한 번에 바꾸어보니

<3화-내 인생은 다큐멘터리더라>


스스로 삶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질 때면 목구멍이 찰 때까지 폭식을 한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술을 마시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에 내면의 폭발에 의해 생기는 행동이다. 주방에 돌아온 지는 3년 만이었고 일을 시작한 지는 1주일 되는 시점이었다. 벌써부터 ‘저 사람, 이 공간의 한계는 이것이구나’라며 재단하기 시작했다. 현재와 같은 직장을 다니고, 아침에 일어나 차 소리가 아닌 새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 엄청난 행운임을 알고도 삶의 방향성을 잡지 못해 괴로워했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문장이 있다. “어제와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건 미친 짓이다” (정말 아인슈타인이 했는지 검색을 해봤는데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변화를 주고 싶으면 만나는 사람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하는 일을 바꾸어 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시차를 두고 하나씩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이 모든 것들이 바뀌어버리니 하루가 다르게 사고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어제 생각과 오늘 고민이 달랐고, 오늘 바라본 세상과 내일 바라본 세계가 달라졌다. 주방의 적성도시간 관리. 이상과 현실의 불균형자기 객관화의 불분명 속에서 허우적 되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종자 연구부터 시작해 다 같이 깨끗한 재료를 사용하고, 농사를 함께하면서 포괄적으로 배움을 이어 나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 마주한 주방은 엄청나게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에다 소통이 부재한 주방 시스템이 더해져 숨 막히게 다가왔다. 딱 이 심정이었다. ‘어.. 이게 아닌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또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외부의 커다란 혼란이 다가오니 내면에서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일하고 그 길로 셰프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곳에서 에너지와 시간을 쏟고 있는가?’.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오로지 내 선택으로 왔음에도 ‘나는 누구인지,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은 삶의 맥락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니 극도록 방황했다. 또한 현실은 주방에서 일하면서도 입으로는 ‘역시 주방 일은 맞지 않는 것 같아’라고 주변에 이야기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내가 가장 싫어하고 있었다.


시간, 생각, 공부가 떠올랐다.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이걸 바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을 왜,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내면을 파악할 최소한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고민을 혼자만 끙끙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글과 대화로 풀어내고 특히 이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한 고민과 생각을 많이 접하고 싶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지금의 나로서는 볼 수 없는 더 울창한 숲을 보고 싶다.


어찌 보면 지금 살아내고 있는 이 시간 자체가 이것들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생각을 안 하고 살아도 문제인데 생각이 너무 많아도 삶은 무거워진다. 지금껏 ‘이런 거 해보고 싶다. 저런 거 해보고 싶다'는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저 머리로만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현장서 몸으로 부딪히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살아보니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더 엄청났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출근해야 한다는 점에서 회사가 답답한 울타리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동일한 생각을 가졌는데 나를 옥죄던 울타리를 다르게 보니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어떤 뻘짓을 하고 정말 머리 지끈하게 삶에 대한 고민을 하더라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울 것이 없는 비슷한 나날들의 연속인 것 같지만 새로운 태양을 마주하면서 또 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마음속에만 움켜쥐던 고민의 실마리가 보일 때도 있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으로 또 길이 터져있는 것 같다. 공동체에 소속되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안정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첫 휴무날, 글쓰기를 하면서 굉장히 신기했던걸 발견했다. '나는 이곳에 왜 왔는가?'에서 시작한 질문이 '지금껏 나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내렸는가?'로 이어졌다. 되돌아보니 지금까지의 선택의 순간에 ‘이걸 지금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이걸 지금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하루 만에 유럽으로 떠났을 순간에도, 오지탐사대를 신청했을 때도, 팬데믹 전 마지막 세계여행 때도 어떤 대의명분도 없었다. 운이 좋게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기회를 잡는 것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건 조금 다른 맥락인 것 같다)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던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으면 일단 실행했다. 이 같은 선택이 반복되고 그 결과물들이 쌓여 지금의 삶이 만들어진 것 같다.


각각의 접근법도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두 가지 방식은 어떤 결과물을 도출시키는가? 두 가지 과정에서 각각 얻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과정에서 내린 선택의 기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의 이해를 깊게 해 주었고, 이는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에 더 많은 안정감을 부여해주는 것 같다. 내 삶은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에 가까운 인생이었다. 엄청난 공을 들여 모든 시나리오가 짜져 있고 그것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촬영을 시작한 명확한 목적은 존재하지만 그 결과물은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았더라면 팬데믹 전 마지막 세계여행은 없었다. 2019년 여름 런던 남동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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