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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트의 연애란,

6화-연애란 짜장면과 같은 것

by 케빈

연애. 이토록 흔하고, 이토록 강렬한 주제가 또 있을까. 수많은 창작물이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수능이 끝나고 논술 시험을 응시하러 서울에 갔을 때이다. 지인이 서울에서 한옥 숙소를 운영하고 계셔서 서울에 갈 때마다 매번 신세를 지고 있다. 12월의 추운 겨울, 국밥을 한 그릇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숙소에 바다 멀리서 특별한 사람이 왔다고 했다. 러시아 사람인데 의대를 나와서 약사를 하다가 전쟁 때문에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아, 신기한 사람이네’ 하고 흘려보냈다. 인생은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 사람이 지금의 여자친구였다.


논술까지 모든 시험이 끝나고 3월에 개강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옥에서 지냈다. 러시아 친구와 부엌에서 마주치면서 대화를 많이 했는데 서로의 나이를 아는지라 이 사람에게 어떤 이성적 호감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어느 순간 상대가 이성적으로 느껴졌다. 마침 함께 강릉에 여행을 갈 일이 있었는데 그날 의사를 표현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더니 대답하기까지 조금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다음날 답변을 받았는데 거절이었다. 본인도 호감이 있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로 지내자고 서로 이야기가 되었다. 속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개강일이 다가와 서울을 떠나 대구로 내려왔고 그렇게 인연은 더 이상 끝날 줄 알았다. 서울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올라갔다가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연락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시금 과거에 했던 질문을 다시 물었다. 이때는 답변이 달라졌다. ‘마침내’ 마음을 열어줬고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가끔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면 외국인과 연애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물어본다. 이것에 대답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가 한국인과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비교 대조군이 없다. 어떤 일이든 다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바사(사람 바이 사람)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트너가 외국인이라서 특별히 느껴지는 건 언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벽이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로 언어는 관계에서 생각보다 비중이 컸다. 우리는 영어로 대화하지만 영어는 우리 둘의 언어가 아니다. 한국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하고, 러시아어로 이해하는 과정. 그 사이에 빠진 감정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특히나 섬세한 이야기나 단어 선택에 신중을 가할 때 필연적으로 힘이 든다.


한국인과 대화할 때도 말하는 속도가 느린 편이다. 머릿속에서 단어 선택과 문장배열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예리한 언어를 표현하지 못할 때 상당히 답답하다. 둘 중 한 명이 상대방의 언어를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양수업을 들었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영어가 괜히 쉬운 게 아니다) 여자친구도 한국에서 2년째 살아가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마음처럼 확확 늘지는 않는 모양이다.


워낙 개인주의적 사람이니 타인에 대한 호감을 가진 적도 많이 없고 가졌더라도 거리가 너무 멀었었다. (한국을 벗어난) 이전에는 연애에 대한 어떤 개념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마치 짜장면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짜장면의 맛을 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수십만 원짜리 미슐랭 식당에서 한 끼를 먹든, 비빔밥을 먹든, 파스타를 먹든 그것은 짜장면이 아니다. 짜장면의 맛은 짜장면을 먹을 때만 느낄 수 있다. 이 고유의 감각과 경험은 연애에서도 동일했다. 여행을 많이 가서 견문을 넓힌다고, 책을 많이 읽어서 지적 능력을 높인다고 채울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오로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누군가와 진실하고도 깊은 교류를 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태초적인 감각이 아닐까 싶다. 올해 막냇동생이 20살로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해줄 수 있는 말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공부를 많이 해라,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라, 여행을 많이 가라가 아니었다. 연애를 꼭 하라고 전했다. 그만큼 한 인간의 삶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고 상쇄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새겨졌다.


상쇄할 수 없는 경험인 이유는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나 혼자 할 수 있지만 사랑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굉장히 나르시스틱 한 사람에게는 말이다. 나르시시즘, 자기애에 빠져있지만 현실은 자신의 결점을 뒤덮기 위해 자아를 팽창시킨 인간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대한 판단을 받았을 정도로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하다. 그 말은 즉슨 자아에 대한 본인의 관점에 결함이 극심함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좋아하지 못하고, 자아를 통합하지 못하는 것. 그 어디를 가도 따라오는 스스로에게 ‘친절’ 하지 못한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비참할까. 하지만 여자친구는 그런 사람에게 온전한 사랑을 보여줬다.


나는 스스로가 무엇이 부족하고, 어디가 어긋나 있는지도 안다. 그래서 더더욱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 사랑해 본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몰랐다. 여자친구가 내게 보여준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그냥 이 사람이라서 이 사람이 좋다는 것이다. 마치 “왜 좋아?” “그냥! 너니깐”처럼 어디 순정 만화 같은 문장말이다. 여자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한 인간이 타인을 저렇게 사랑할 수 있구나를 배웠다. 고백하자면 연애를 하면서도 여자친구가 좋고 사랑스러웠지만, 정말 깊숙하게 단전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반면 성숙했던 상대방은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아마 이 감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변되거나 형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감정을, 이 느낌을 스스로도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연애는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처음 보는 경험이다.

그 사랑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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