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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세계여행'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태어나서 처음 '한국영사관'에 가봤다

by 케빈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를 통과하려 했을 때이다. 직원에게 여권을 보여준 후, 드디어 유럽에 돌아간다는 마음에 설레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게 "너 유럽에 못 들어가"라고 하며 가로막는 것이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종종 겪었지만, 99%가 직원들의 착오에서 왔었다. 내게 ‘너 비자 있어?’,‘나 한국인이라서 비자 필요 없는데?’라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후, 자기들끼리 한국 여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무 탈 없이 보내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들의 착오인지 알았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전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내 여권에 선명하게 찍힌 프랑스 입국, 오스트리아 출국 스탬프였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라면 셍겐 조약에 속해있는 대부분의 유럽에 최종 출국일 기준으로 이전 180일 중 90일을 무비자로 머무를 수 있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나는 83일을 머무른 것이다.


3달가량의 시간을 유럽에서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계산법을 완벽하게 이해 못한 채, 혼자만의 계산법으로 유럽을 떠나 30일을 다른 곳에서 보낸 후 재입국하면 다시 30일을 더 머무를 수 있다고 착각(이런 멍청이도 없을 것이다)하고 있었고, 이런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180일 중 90일을 머물렀으면 90일을 다른 곳에 머물러야지 재입국이 가능합니다.


천만다행으로 직원이 "너 그럼 유럽에 얼마나 더 있어?"라고 물었을 때 재빨리 머리를 굴려 "1주일 뒤에 쿠바 가는 비행 기타"라고 일단 얼버무려 비행기는 탈 수 있었다. 내가 겪어본 상황 중에서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기에 1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 동안 머리가 텅하니 비었고, 헛웃음만 나왔다.


쨋든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최대한 빨리 '어떠한 조치'라도 취해야 했기에, 나의 상황을 한번 그려봤다.


1. 유럽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앉아 있었고

2. 불법체류자가 되기까지 7일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3. 그리스> 로마 / 로마> 포르투갈 / 포르투갈> 독일 그리고 11월 20일 파리에서 쿠바로 가는 총 4장의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비행기 안에서부터 그리스에 도착하고도, 하루 종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영사관에도 가보고, 검색하고, 혼자 곱씹어보니 최종적으로 2가지 안이 나왔다.


일정대로 여행을 진행하고, 이후 프랑스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손에 내 운명을 맡긴다.

7일 뒤 유럽을 떠나기 위해, 일정을 통째로 변경한다.


2주를 유럽에서 더 머물기 위해서, 내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최악의 경우 벌금과 향후 쉥겐국 입국 금지)는 너무 컸다. 다행히 사흘 뒤 로마로 가는 비행기표를 다행히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로마에서 아웃을 하는 것으로 확정 지었다.


그렇게 고비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로마에서 '어디로' 향하는가가 문제였다.


이전 일정처럼 쿠바로 넘어간다

아시아로 넘어가 일정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여행한다.


오랜 여행을 하다 보니, 가족이 그리울 때가 많아,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꼭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내고 싶었고, 마침 밴쿠버에 삼촌네가 살고 계셔서 연말 즈음 캐나다로 넘어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자를 택했을 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캐나다의 가족들과 보내기가 쉽지 않은 동선이었다. 후자를 택했을 때는 단지 방문순서가 바뀔 분. 내가 원하는 곳을 가볼 수도 있고, 가족들과 시간도 보낼 수 있는 2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후자를 택했다.


그렇게 비행기표를 살기 위해, 가장 표가 쌌던 말레이시아 공항이 어디 있냐 지도를 보던 중이었다. 갔다 온 사람들이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조지아'여서 언젠간 한번 가보고 싶어서 표시를 해놓았던 별이 지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나 가는 길이니 하는 마음에 비행기표를 찾아보니, 가격도 10만 원 안팎이었고, 그렇게 나는 내 손에 쥐어진 3장의 티켓을 버리고 로마에서 무사히 출국해, 현재 '조지아'에 있다.



조지아 조지아 하는 이유가 있더라구요

요즘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 계속 느꼈지만 , 이번 일로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여행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이기에, 많은 사건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알고, 곰곰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안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정말 항상 거짓말처럼 내가 생각하는 답보다 더 나은 답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누군가 내가 여행에서 어떤 걸 배웠느냐고 묻는다면 , 난 ‘평정심’을 배웠다고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할 것 같다. 그리고 실패해도 괜찮을 때 많이 실패해보고, 또 이걸 해결하면서 몸으로 인생과 삶의 지혜들을 잘 배워놓아야 하는 듯했다.


이번 사건처럼 인생도 한순간에 180도 바뀔 수 있겠구나를 느껴졌다. 아직은 괜찮지만,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는 한 번의 실패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몸으로 지혜를 배워둔 사람은 훗날 정말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최소한 '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것이고 , 그렇게 '최악의 상황'은 면하리라 믿는다.


나의 '무지'로 인해 일어난 일이지만, 다시금 나를 돌아보고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 앞으로 이 험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번 일처럼 항상 평정심을 잃지 말고, 문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처음부터 문제를 안 만드는 게 최고


2019.11.01

In Athens,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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