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입학 전 경험했던 수많은 교사와 친절한 서비스. 이에 익숙해 진 학부모와 아이들이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공교육의 시작이며 진짜 학생, 학부모가 된 것이죠. 그럼 이들이 앞으로 초등학교에서 만날 교사와 가장 쉽게 비교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어린이집, 유치원, 학습지, 학원 선생님일 것입니다. 그들만이 초등 아이 학부모가 알고 있는 교사의 전부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앞서 경험한 교사의 공통점을 찾아볼까요?
첫째, 그들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교사입니다.
충분한 검색 및 방문을 통해 미리 비교 검토해 보았지요. 즉, 교사 또는 그 기관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1:소수’라는 환경 구성입니다.
이들 교사는 1:1 또는 10명 안팎의 학생만을 가르칩니다.
셋째, 언제든지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합니다.
매일 적혀오는 교육 수첩부터 수업 후 브리핑까지. 거의 매일 아이의 생활과 학습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사항이나 불평 사항, 요구사항이 있을 땐 주저 없이 활짝 열려있는 그곳으로 전화 및 방문 상담이 가능합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빠르면 생후 몇 개월부터 어린이집과 같은 교육기관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학부모 역시 본인들이 경험했던 때와는 너무 다른 교육 서비스에 이미 익숙해진 채로 초등 학부모가 되었습니다. 지난날 학부모라는 새로운 역할을 얻게 된 후 가장 먼저 접한 교육이, 다름 아닌 ‘교육은 서비스’라는 개념으로 제공된 돌봄과 친절, 무조건적 수용과 같은 것이었던 거죠. 학부모와 아이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쉽게 말해 ‘기 살려 주기’가 이들 교육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다른 것이지 틀린 게 아니다.’
‘아이의 문제점이 아닌 좋은 점을 찾아라.’
유치원, 학원교사와 학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취학 아동에게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 있게 무엇이든 도전하며 작은 규칙들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첫 사회생활 적응을 위한 필수겠지요. 사교육은 또 어떠한가요? 아이의 흥미와 학부모 만족이 없다면 경쟁력을 잃습니다. 유치원과 학원의 역할에서 이러한 서비스적 교육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초등 담임교사라는 이들의 특징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정한 대로 그 반, 그 선생님의 학생이 되는 것이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담임교사를 바꿀 수도, 다른 곳으로 학교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둘째, 교사 한 명당 25명~40명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이는 곧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개별적인 파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로 이어집니다.
셋째, 공식적인 상담은 1, 2학기 2회가 전부입니다.
아이 생활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별 용건 없이 상담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학교에 걸음 하는 자체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렇듯 학부모는 초등학교 시작과 동시에 불평이 생깁니다. 전 단계까지 받았던 교육적 서비스는 온데간데없고 “스스로 하기”라는 편리한 무기 만 쏘아대는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초등교사를 만난 것만 같습니다. 살짝 서운했던 감정이 점점 커져 학부모의 불평은 계속 쌓여만 갑니다.
“그럼 초등학교는 획일화된 일방적 교육만 해도 괜찮다는 건가요?”
“서비스적 교육이 시대의 흐름이라면 학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익숙한 이 흐름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초등교육이 변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미 초등교사들도 아이들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인정한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이의 성장에 맞추어 방법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0~1세 부모는 늘 아이의 보호자여야 한다. 1~3세는 양육자, 3~7세는 훈육자, 7~12세는 격려자, 12~20세는 상담자, 20~40세는 동반자가 되어 아이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도 아이와 함께 성장해야 하고 부모가 조금 앞서가서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늘 아이의 모든 것은 통제하며 자기 뜻대로 하려는 보호자가 되려 하거나 아이의 발달 시간표와 상관없이 끌고 가려고 할 때 아이는 불행해진다.
- 독이 되는 동화책 약이 되는 동화책 中 -
‘아이의 성장과 행복’은 모든 교육, 모든 학부모와 교사의 지향점입니다. 하지만 간혹 학부모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지요. 바로 단계별 성장입니다. 엄마가 세 살 아이에게 밥을 떠먹여 준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여덟 살 아이에게 같은 행동을 하면 아빠도 말립니다. 왜일까요?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죠. 누구도 친절했던 엄마가 불 친절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유아 단계의 무조건적 수용은 초등학교에서는 지양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처음 겪는 교사의 단호한 태도가 학부모에게는 서운하고 불친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교사가 아이의 단계에 맞춰 그 역할을 다하고 있더라도 부모의 역할이 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둘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거죠. 문제는 그 피해를 떠안는 게 오롯이 아이란 겁니다.
한 선생님이 고민을 토로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안돼’라는 말에 너무도 부정적인 것 같아요. 그 말을 자기를 미워한다 생각해요. 학부모님들도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요.”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니 기본적인 규율마저 무너지고 있는 것이 지금 초등 교육현장의 고민입니다. 한 아이가 바다를 빨갛게 칠합니다.
“바다가 파란색이지, 왜 빨간색이야?”
이렇게 말하는 교사는 이제 없습니다. 유치원, 학원, 초등학교 선생님 모두 “이 바다는 왜 빨갛게 표현했어?” 질문하고, “노을 지는 바다라고? 멋지다!” 감탄해줍니다. 격려하고 칭찬합니다. 아이의 창의력을 높이 삽니다. 그런데 아이가 파란색을 ‘이불색’이라 우깁니다.
유아 단계에서는 마땅히 받아주어야겠죠. “왜 ‘이불색’이라고 생각했어?” 묻고, “우리 OO의 이불은 파란색이구나. ‘이불색’ 너무 재미난 이름이야.” 호응해줍니다.
초등학생 아이가 파란색을 ‘이불색’이라고 우깁니다.
“OO이불은 파란색이구나. 선생님 이불은 빨간색인데. 이불의 색은 저마다 다 달라서 우리는 이런 색을 파란색이라고 부르자 약속했단다. 앞으로는 이 색을 파란색이라고 불러보자.”
묻고, 설명하여 이해시키고, 바르게 고쳐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1학년에 한해서입니다. 더 높은 학년의 아이에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압니다.
“이건 파란색이야.”
파란색은 파란색이라고 확실히 알려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앞으로의 사회생활에서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너의 생각도 맞아”,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야”에 너무 익숙해진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틀린 것도 맞았다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생활 습관 훈련 과정에서도 “왜 안돼요?”라고 묻는 것이 ‘왜? 라고 물을 줄 알아야 한다’는 훈훈한 교육 아래 당연시 여겨집니다. 무엇이든 섣불리 아는 게 가장 위험하다고 하죠? 잘못 적용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이희영 소설 ‘페인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너의 생각도 맞아’라고 해줘야 할 순간이 있고 ‘아닌 건 아니다’라고 확실히 말해줘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왜?” 대신 “네”라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경계를 분명히 알려주고 규칙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않는 선에서 남들과 더불어 자유로이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게 이끌어 주는 것. 그게 바로 초등교사의 역할입니다. 엄격한 통제보다도 더 독이 되는 건, 자율과 창의라는 포장지로 원칙조차 없는 방임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겁니다. 규율과 자율이 조화를 이루는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시행착오를 거치며 창의력과 사회성을 길러 나가는 거지요. 때론 이 과정에서 학부모로서 서운함을 느낄지라도 교사의 단호함이 곧 불친절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혼낼 존재가 아니라 가르쳐야 할 존재다. 혼내면 아이가 배우지 못한다.’고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님은 말씀하셨지요. 학부모가 갖춰야 할 건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상처 주는 혼’만 내고 있는지 구별하는 안목과 평정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