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을 읽은 지는 꽤 되었지만, 이 문장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문장은 1870년대의 모습을 다뤘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요새 SNS나 뉴스를 보면, '나는 행복하다.'라고 정의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만 하는 것 같다. 실제로 2024 트렌드 코리아의 키워드 중 하나도 바로 '육각형 인간'이다. 타고난 집안, 외모, 능력, 직업, 학벌, 성격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일종의 '스탯'화하여 개개인에게 점수와 순위를 매긴다. 6개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완벽한 인간을 육각형 인간이라고 칭하며, 이러한 육각형 인간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반면 이 스탯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찌그러진 육각형으로 여긴다. <안나 카레니나>의 소설처럼, 불행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찌그러진 육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육각형인간론'을 한번이라도 들어봤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과연 6개 중 몇 개가 해당되는지 한번쯤은 계산해봤을 것이다. 이처럼 무차별적인 인간 등급 매기기의 파급력은 강력하다. 평범한 개인을 부족한 인간으로 분류하고 지금보다 더욱 열심히 살도록 종용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너무너무 열심히 사는 게 문제다. 하루에 최소 9시간씩 일해놓고 주말에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겨우 뒤처진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각박한 기준을 들이밀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유=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개팅에서 스스로를 소개한다고 가정하자. 저 육각형 인간의 6가지 스탯을 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이름 석자 빼고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만한 게 별로 없을 것이다. 취미나 좋아하는 것으로 나를 소개하더라도 제대로 된 소개를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몇십 년 이상 소유물 안에서 나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나의 학력은 어떻고, 내 직업은 무엇이고, 차나 집을 가지고 있는지 등 나의 정체성을 내가 소유한 무언가로 소개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를 포함한 사회구성원들이 소유한 것(학력, 직업, 등)에 점수, 등급, 순위 등으로 매기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 평가시스템에서 저평가를 받는 사람은 '흙수저', '꼬이직', '누칼협' 등의 갖가지 용어를 사용해 조롱한다. 마치 본인은 이 시스템 안에서 영원히 승자일 것처럼 말이다. 과연 이 평가시스템에서 많은 걸 가진사람은 영원한 승자일까?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상위 몇퍼센트 안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만약 나 스스로는 100점 만점에서 98점짜리 인간이고 주변 친구들은 80점, 70점짜리 인간이라 여기고 있다고 치자. 나는 나의 정체성을 소유물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주변의 그 누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점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스템 안에서 상대적인 승자다.
그러던 중 갑자기 99점 인간이 나타났다. 나는 불행해지는가? 아마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나를 98점짜리 인간이라고 가치를 매기는 순간, 주변 인물들에게도 가치를 매기고 상대평가를 하게 된다. 점수가 높을수록 행복하다고 여기는 이 자본주의 게임 안에서는 98점짜리 인간인 나는 99점짜리 인간보다 행복해질 수 없다.
사실 내가 제시한 점수사회 속 '100점 만점에서 98짜리 인간'이라는 가정은 전제부터 잘못됐다. 왜냐하면 그 점수를 어떤 기준으로 매기는지는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기는 사람마다 점수가 다르다는 뜻이다. 어느 것에 비중을 두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전원에서 점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에게 점수를 매기는 것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도대체 내가 이 사회에서 몇 점짜리 인간인지, 쟤는 몇 점짜리 인간인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들을 나의 경계 안에 넣으려 한다. 나의 특별한 경험, 내 애인의 학력과 직업, 자식들의 학력이나 직업, 내 부모님의 수저색깔 등. 더 많은 기준과 가치를 점수로 만들고, 내 점수가 몇 점인지 가늠함으로써 불안을 떨쳐내려 한다.
올해의 키워드인 육각형인간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유=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나의 육각형이 작은 육각형이나 찌그러진 육각형은 아닌지 수시로 가늠을 한다. 친구나 지인보다 크고 완벽한 모양이면 그제야 안심을 한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큰 육각형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날 잠은 다 잔 것과 다름없다. 밤새 불안에 떠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식의 줄 세우기는 끝이 없다. SNS가 지금보다 더 발달해서 개개인의 육각형 스탯을 전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면, 80억 지구 사람들을 모두 점수화하여 줄 세우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세상은 가장 완벽한 육각형 인간 단 1명을 제외한 모두가 불행한 세상이 된다. 이렇듯 인간의 존재를 소유물 점수와 육각형 스탯으로 판단하면, 불행한 '비'육각형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여럿 탄생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육각형 인간이 되지 말라는 건 아니다. 소유한 것이 많고 완벽하면 당연히 좋다. 경쟁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것은 39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2024년의 우리나 똑같기 때문이다. 다만, 소유물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어떤 객체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나의 행위는 삶의 과정에서 스쳐가는 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손에 쥔 것들은 또 언제든 다시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소유로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로 나를 표현하는 이 사상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법정스님은 늘 무소유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사실 소유는 평생 우리와 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것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 돈을 쓰고 싶은 것이지, 돈에 인생을 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열심히 사는 나머지, 가끔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 잊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의 목적성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